검심결, 마음으로 베다

물막이 너머의 칼빛
동굴 입구 바깥에서 울리던 발소리는, 잠깐의 착각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잠시 뒤에는 더 늘었다.
폭포수 뒤로 비치는 그림자가 물결에 일그러지며 흔들렸다. 누가 몇 명인지 또렷하진 않았지만, 칼집 끝이 물막이에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었다.
남소월이 낮게 속삭였다.
"정면으로 나가면 곤란하겠네요."
서문진은 창해의 잔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짧았다.
검이라기보다는 부러진 송곳니에 가까운 길이였다. 하지만 손안에 들어온 감각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차갑고, 묵직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쇠의 기운.
동굴 바깥에서 거친 음성이 들렸다.
"안에 있는 거 안다. 반옥과 그 검을 놓고 나오면 목숨은 붙여 주마."
남소월이 작게 혀를 찼다.
"강호에서 저 말 믿고 살아난 사람, 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저도요."
그녀는 허리춤의 비도를 살짝 고쳐 쥐었다. 눈빛은 웃고 있었지만, 호흡은 이미 싸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문진은 폭포 뒤로 비치는 그림자의 위치를 가늠했다. 셋은 앞에 있고, 둘은 좌우로 돌아가는 기척이었다. 입구만 막아선 게 아니라, 물러날 길까지 재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다 문득 멈췄다.
마음으로 베어라.
조금 전까지는 그 말이 가슴을 울렸다. 그런데 정작 칼을 맞댈 순간이 오자, 그 한마디는 오히려 더 멀게 느껴졌다. 마음으로 벤다니. 지금 필요한 건 빠른 발과 센 팔 아닌가.
폭포수 뒤에서 검끝 하나가 번쩍 비쳤다.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서문진이 먼저 물막이를 뚫고 나갔다.
차가운 물줄기가 얼굴을 후려쳤고, 바로 다음 순간 쇳소리가 터졌다. 회색 옷의 사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사선으로 검을 긋고 들어왔다. 서문진은 잔검으로 받아냈다.
짧다.
그 사실이 첫 합부터 뼈저리게 느껴졌다.
평소 쓰던 검이었다면 닿았을 거리에서, 잔검은 반 치가 모자랐다. 그는 억지로 한 걸음 더 파고들어 손목을 틀었다. 상대의 검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따끔한 열감이 올라왔다.
사내가 비웃었다.
"장난감 들고 나왔군."
말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에서도 칼바람이 몰아쳤다. 서문진은 몸을 낮춰 피했지만, 이번에는 세 번째 놈이 발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합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문파는 아닐지라도, 여러 번 사람을 포위해 죽여 본 손놀림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잔검을 크게 휘둘렀다.
쨍.
막긴 막았으나, 손목이 저렸다.
검은 짧고 상대는 셋이었다. 더구나 그는 아직 잔검의 무게 중심도 완전히 읽지 못했다. 방금 전 동굴 안에서 느꼈던 묘한 전율은, 실전의 쇳소리 앞에서 순식간에 엉켜 버렸다.
그때 폭포수 곁 바위 위에서 남소월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왼쪽 눈!"
서문진은 묻지 않았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왼쪽 사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그 순간 남소월이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놈의 미간을 정통으로 때렸다. 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사내가 욕설을 내뱉는 찰나, 서문진의 잔검이 짧게 번뜩였다.
소매가 잘려 나갔다.
살은 베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한순간 틈은 만들었다. 남소월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바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한 사내의 무릎 뒤를 걷어찼고, 몸이 기우는 순간 검등으로 손목을 후려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싸움 길게 끌지 말아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해요!"
말은 쉬웠다.
서문진은 다시 한 번 상대의 칼을 맞받아냈다. 이번엔 힘으로 누르지 않고 흘리려 했지만, 타이밍이 반 박자 늦었다. 벽에 적힌 문장과 실제 손끝 사이에는 생각보다 먼 골짜기가 있었다.
상대 검끝이 그의 턱 밑까지 파고들었을 때, 서문진은 거의 본능으로 몸을 틀었다. 날은 빗겨 갔지만, 숨이 목에 걸렸다.
그때 뒤쪽에서 낮은 외침이 들렸다.
"죽이지 마라! 물건만 챙기면 된다!"
지휘하는 자의 목소리였다.
서문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물건.
반옥과 잔검, 그리고 어쩌면 검심결의 사본까지. 상대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동굴 입구를 밟는 순간부터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남소월이 재빨리 폭포 오른편 바위를 가리켰다.
"저쪽 틈!"
그제야 서문진도 보였다. 물줄기 안쪽으로 반쯤 가려진 가느다란 틈새 하나. 사람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았지만, 급한 몸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일부러 정면의 사내를 향해 한 걸음 깊이 파고들었다. 상대는 잔검의 짧은 거리를 비웃듯 검을 길게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서문진은 뒤가 아니라 앞으로 몸을 숙였다.
짧은 쇠붙이는 긴 칼 아래로 파고들 때 뜻밖의 이빨이 되었다.
잔검 끝이 사내의 허리띠를 스쳤다. 칼집과 허리띠가 함께 끊어지며 검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사내가 움찔한 사이, 남소월이 그의 등을 밀쳤다.
"지금!"
두 사람은 폭포수 안쪽의 틈으로 몸을 던졌다.
돌과 물 사이의 숨은 길은 사람을 환영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한 걸음 잘못 디디면 아래로 떨어질 절벽이었고, 발밑은 온통 젖은 이끼였다. 하지만 뒤를 쫓아오는 자들 역시 속도를 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미끄러지고 기어오른 끝에야, 두 사람은 산등성이 아래 오래된 사냥꾼 막사 하나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래도 비를 피하고 숨을 고르기엔 충분했다.
남소월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살았네요."
서문진은 대답 대신 잔검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싸움은 이겼다고 하기도, 졌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분명 살아 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은 묵직했다.
검심결을 손에 넣고도 그는 여전히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나빴다.
그는 조급함으로 검을 휘둘렀다.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 문
사냥꾼 막사에서의 사흘은 길고도 짧았다.
길었던 건 시간 때문이 아니라, 서문진의 마음 때문이었다. 짧았던 건 잠깐만 눈을 붙였다 하면 곧장 수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첫날에는 호흡도를 다시 베껴 읽었다.
둘째 날에는 죽간에 적힌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셋째 날에는 거의 말수가 사라졌다.
비가 그치면 그는 막사 앞 공터로 나갔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맞으며 섰고, 안개가 끼면 안개 속에서 검을 들었다. 창해의 잔검은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손목을 속이지 않았다. 어설픈 힘이 들어가면 곧장 무게가 뒤틀렸고, 숨이 흐트러지면 검끝이 먼저 흔들렸다.
그는 외원 기본식부터 다시 밟았다.
발을 반 보 앞으로.
어깨 힘을 빼고.
허리를 억지로 꺾지 말고.
베는 것이 아니라 길을 그리듯.
머리로는 알겠다 싶었다. 몸도 어느 정도는 따라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꼭 벽에 머리를 박는 기분이 들었다.
검심결은 초식이 적었다.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많았다.
시선이 먼저 닿는 자리를 따라 뜻을 보내라.
상대의 칼을 보지 말고, 칼이 가려는 마음을 보라.
검은 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문장들은 짧았고, 읽을 때는 분명한 것 같았으나 막상 검을 들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서문진은 나뭇가지 위에 매단 마른 잎을 향해 검을 그었다.
잎이 반쯤 찢기고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는 다시 했다.
이번에는 잎도 못 건드렸다.
세 번째에는 너무 세게 휘둘러 아예 가지째 부러뜨렸다.
남소월이 막사 문가에 기대 선 채 그걸 한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저건 검심결이 아니라 화풀이 같네요."
서문진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마음으로 베라 했으니, 마음을 싣고 휘두르고 있습니다."
"아뇨. 화를 싣고 휘두르고 있죠."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서문진은 대꾸하지 못했다.
남소월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을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 잎이 당신한테 무슨 원수를 졌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미워해요?"
서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잘 안 되니까."
남소월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만들려고 하면, 더 안 되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가 가만히 있으래요. 다만 방향이 틀렸다는 거예요."
그녀는 잎을 날려 보냈다. 바람을 탄 잎이 빙글 돌며 멀어졌다.
"지금 당신은 검을 배우는 게 아니라, 지난날의 모욕을 이기려고 해요."
서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남소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외원에서 들은 비웃음, 비무대에서 느꼈던 답답함, 늘 한 걸음 늦을까 봐 겁나는 마음. 그걸 다 한꺼번에 쥐고 검을 휘두르니 손끝이 굳죠."
서문진은 잔검 자루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강해지고 싶었다.
비웃음을 돌려주고 싶어서.
다시는 업신여김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누군가를 잃는 일을 막기 위해서.
객잔에서 처음 칼을 맞댔던 밤도, 낙명곡에서 달아나던 순간도, 낙양 비무대회에서 수많은 시선 속에 섰던 때도, 그의 안에는 늘 비슷한 것이 있었다.
늦지 않겠다는 조급함.
쓸모없는 자로 남지 않겠다는 악착같음.
그 마음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검심결이 요구하는 것은, 그 조급함 자체를 더 날카롭게 가는 일이 아닌 듯했다.
남소월이 그의 손을 툭 쳤다.
"손 펴요."
서문진이 무심코 손을 펴자, 손바닥 중앙이 벌겋게 쓸려 있었다. 자루를 너무 세게 쥔 탓이었다.
남소월은 약초를 짓이겨 그의 손바닥에 눌러 붙였다.
"검은 손에 있지 않다면서요."
"방금 전까지는 제 손에만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죠."
그녀는 붕대를 묶으며 덧붙였다.
"당신 검 안에는 아직 남들 목소리가 너무 많아요."
"……"
"쓸모없다, 느리다, 모자라다. 그런 소리들요. 그걸 다 안고 휘두르면, 검이 당신 마음을 따르겠어요? 그 소리들을 먼저 따르겠죠."
서문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막사 밖에선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검을 잡으면 늘 앞만 봤다. 상대의 손, 검끝, 보법, 빈틈. 이겨야 할 것들만 보았다.
정작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한 번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한참 뒤, 그가 낮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소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제가 다 알면 벌써 천하제일이 됐겠죠."
그녀는 빙긋 웃더니,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어요."
"무엇입니까?"
"검을 잘 쓰고 싶으면, 먼저 왜 검을 드는지 똑바로 알아야 해요."
그 말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비급의 문장보다 깊게 박혔다.
왜 검을 드는가.
강해지기 위해?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서문진은 처음으로 수련을 멈췄다.
잔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래 앉아만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고, 안개가 흘렀다.
그리고 오래전 외원 연무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남들이 비웃던 느린 검식.
손에 물집이 터지도록 반복하던 날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간.
그 시절의 자신은 강해 보이고 싶어서 검을 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버티기 위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언젠가 제대로 한 번은 사람답게 서 보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 어딘가의 매듭 하나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지키고 싶은 마음
나흘째 되는 날, 두 사람은 산 아래 작은 장터로 내려갔다.
양식과 붕대, 먹과 종이가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계속 산속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몸보다 먼저 의심이 굳는다. 남소월의 말대로, 때로는 사람들 틈으로 내려가 숨을 섞는 편이 더 안전할 때도 있었다.
장터는 비가 잦아든 뒤라 어수선했다.
젖은 볏짚 냄새와 삶은 국수 냄새가 한데 섞여 있었고, 상인들은 진흙 묻은 발판 위에 물건을 다시 늘어놓느라 분주했다. 산짐승 가죽을 파는 사내가 목청을 높였고, 아이 둘이 엿장수 앞에서 다투고 있었다.
그 평범한 소란이 오히려 낯설 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남소월은 약재 가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린 황정의 상태를 살폈다. 서문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살폈다. 몸을 낮추고 모자를 눌러쓴 채였지만, 이런 곳일수록 방심하면 안 됐다.
그리고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
장터 어귀로 회색 옷 둘이 들어섰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먼 길 걸어온 무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걷는 속도가 너무 일정했고,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오른손 검지에 있는 굳은살 자리가, 며칠 전 동굴 앞에서 마주친 자들과 비슷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소월."
남소월은 약재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봤어요."
"둘뿐은 아닐 겁니다."
"당연하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너편 천막 뒤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세 명.
그리고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장터 한복판에서는 먼저 칼을 빼는 쪽이 불리했다. 사람들 비명이 터지면, 숨을 감춘 자들이 한꺼번에 덮쳐 올 것이 뻔했다.
회색 옷의 사내 하나가 엿장수 수레 옆을 지나며 아주 미세하게 손을 움직였다.
서문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암기다.
가는 쇳조각 하나가 아이 쪽으로 날아갔다. 직접 노린 건 아니었다. 아이가 놀라 쓰러지면 장터가 어지러워지고, 그 틈에 칼이 오갈 터였다. 사람 목숨을 도구로 여기는 방식이 아주 익숙한 놈들이었다.
서문진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이와 엿장수 수레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잔검이 짧게 튀어 올랐다.
딸깍.
쇳조각이 검면을 맞고 옆으로 튕겼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남소월이 벌써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엿장수에게 소리쳤다.
"엎드려요!"
그 한마디로 장터가 뒤집혔다.
비명과 욕설이 한꺼번에 터졌고, 사람들이 좌판을 밀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색 옷의 사내들은 더 숨길 생각이 없어진 듯 검을 빼 들었다.
첫 번째 놈이 곧장 서문진에게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검은 길었다. 잔검으로는 정면에서 맞부딪칠수록 손해였다.
사내의 어깨가 먼저 움직였다.
서문진은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칼이 아니라, 칼이 오려는 길이 먼저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이 충분했다.
그는 날을 보지 않고 빈자리를 밟았다. 상대 검이 지나갈 자리를 비켜난 몸이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잔검은 크게 휘둘러지지 않았다. 손목 하나, 반 치.
사내의 손등에서 피가 한 줄기 그어졌다.
검이 떨어졌다.
서문진 자신도 잠깐 눈을 깜빡였다.
지금 방금 한 동작은 빨랐다기보다, 늦지 않았다.
그것뿐인데 결과가 달랐다.
두 번째 놈은 뒤에서 허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서문진은 돌아서지 않았다. 발뒤꿈치에 닿는 흙의 감각, 등 뒤로 밀려드는 살기, 왼쪽에서 들리는 국수 그릇 깨지는 소리까지 한꺼번에 들어왔다.
마음이 먼저 닿으면, 짧은 쇠붙이도 하늘을 가른다.
죽간의 문장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는 돌아보는 대신 반 걸음 옆으로 옮겼다. 동시에 잔검을 뒤로 빼듯 올렸다.
짧은 쇳소리.
상대의 칼끝이 허공을 긁었다. 이어 잔검의 검등이 놈의 팔목 안쪽을 쳤다. 칼은 방향을 잃고 좌판 위로 날아가 박혔다.
"이 자식…!"
세 번째 사내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왔다. 놈은 칼 대신 비수를 들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약재 가판 앞에 있던 어린 계집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장터의 소음이 한순간 움츠러들었다.
아이가 숨도 못 쉬고 파들파들 떨었다. 남소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놓아."
사내가 비웃었다.
"한 걸음만 더 오면 이 아이 목부터—"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서문진은 뛰지 않았다.
조급해지면 늦는다.
그는 아주 천천히 한 발을 옮겼다. 상대의 눈이 그 발에 끌렸다. 바로 그 순간, 사내의 어깨와 손목과 비수 끝이 서로 어긋나는 짧은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서문진의 마음이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검은 뒤따랐다.
잔검이 한 줄기 회색빛으로 번쩍였다.
사내의 손안에서 비수 자루가 두 동강 났다.
날은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았다.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부러진 비수와 서문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 짧은 놀람이 끝나기 전에, 남소월의 손끝에서 날아간 비도가 놈의 소매를 나무기둥에 박아 버렸다.
"다음은 소매가 아닐 텐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터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문진은 잔검을 들고 서 있었다. 숨은 거칠지 않았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온몸을 조이던 조급함도, 증명해 보이겠다는 오기도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대신 아주 단순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먼저 자리를 잡자, 검은 쫓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곳에 닿았다.
남소월이 다친 아이를 어머니 품에 돌려보낸 뒤, 서문진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방금 그거."
서문진이 낮게 답했다.
"저도 압니다."
"아뇨, 아직 다 알진 못할걸요."
그녀는 웃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래도 문 앞까진 왔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진은 이상하게 부끄럽고도 홀가분해졌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검심결이 말하는 '마음'은 뜬구름 같은 깨달음이 아니었다.
화를 키우는 마음도 아니고, 자존심을 세우는 마음도 아니었다.
무엇을 베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에 가까웠다.
그 차이를 아는 순간, 검끝의 방향이 달라졌다.
검과 마음이 같은 곳을 보다
장터 싸움 뒤, 두 사람은 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각자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소월은 중간중간 서문진을 힐끗 봤고, 서문진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직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섣불리 말로 꺼내면, 방금 잡힌 감각이 도망갈 것만 같았다.
막사에 돌아오자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저녁밥도 대충 넘긴 뒤, 서문진은 잔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남소월은 따라나오지 않았다. 다만 문턱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중의 저녁은 조용했다.
멀리서 이름 모를 새가 한 번 울고, 바람이 젖은 풀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문진은 공터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았다.
발바닥 아래의 흙을 느꼈다.
왼쪽 어깨를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호흡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빨라지려 하지 않았다.
정확해지려 애쓰지도 않았다.
보여 주려는 마음도, 이겨 내려는 마음도 접어 두었다.
그저 하나만 남겼다.
검이 닿아야 할 곳을 먼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그는 외원 기본식의 첫 자세를 밟았다.
반 보 앞으로.
어깨 힘을 놓고.
허리를 억지로 세우지 않고.
베는 것이 아니라 길을 그리듯.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예전에는 각각 따로 놀던 것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발이 먼저 있고, 허리가 뒤따르고, 팔이 마지막에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 셋이 나뉘지 않았다. 호흡과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번째 식으로 이어 갔다.
잔검은 짧았다.
하지만 짧다는 사실이 더는 모자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더더기가 없었다. 닿아야 할 만큼만 닿고, 머물러야 할 만큼만 머물렀다.
셋째 식이 이어지는 순간, 바람에 떠밀리던 낙엽 하나가 검앞으로 흘러들었다.
서문진은 그 잎을 쫓지 않았다.
잎이 올 자리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검이 그 자리에 먼저 가 있었다.
사각.
너무 가벼운 소리라 바람에 묻힐 뻔했다.
낙엽이 반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서문진은 한동안 그대로 섰다.
검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심장은 빨리 뛰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고요했다. 힘으로 부순 것이 아니었다. 속임수로 얻은 것도 아니었다. 겨우 한 걸음, 정말 겨우 한 걸음이지만, 그는 분명히 다른 문턱 위에 서 있었다.
남소월이 막사 문가에서 말했다.
"이번엔 잎이 불쌍해 보이진 않네요."
서문진은 웃었다.
"아까보단 덜 미워한 모양입니다."
"이제야 검이 당신 말을 좀 듣나 봐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을 듣는다기보다… 제가 먼저 검의 말을 조금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남소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 제법 그럴듯한 말도 하네요."
"비웃는 겁니까?"
"아뇨. 진심이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방금 전 장터에서도 그랬어요. 당신 칼이 처음으로 누굴 이기려 들지 않았어요."
서문진은 잔검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창해의 검신엔 저녁빛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온전한 명검이었다면 더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더 길고, 더 위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안에 있는 것은 부러진 검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래서 더 잘 맞았다.
자신 역시 온전한 무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원의 잡역제자였고, 남들보다 늦었고,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왔다.
부러진 검이 아직 베는 법을 잊지 않은 것처럼, 모자란 사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서문진의 가슴을 묘하게 뜨겁게 만들었다.
남소월이 품속에서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아까 장터에서 챙긴 거예요."
"뭡니까?"
"회색 옷 놈 소매 안쪽에서 떨어졌어요."
그녀가 종이를 펴 보였다.
짧은 암호문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먹이 번진 부분이 있었지만, 두 줄은 분명했다.
백로암으로 옮긴다. 장문의 행방은 입을 다물 것.
서문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문?"
남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장문인인지는 아직 모르죠. 하지만 단순히 반옥과 잔검만 쫓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서문진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장문의 행방.
그 말은 단순한 도주나 실종과는 다른 냄새를 풍겼다. 누군가 숨기고 있고, 누군가는 입을 다물라 명했다.
동굴의 죽간에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의 이름보다 마음의 향방을 먼저 의심하라.
그는 천천히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검심결은 아직 초입이었다. 창해의 잔검도 반 토막뿐이었다. 손에 든 진실은 조각나 있었고, 앞길은 더 짙게 흐려졌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조급함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문진은 잔검을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검끝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끝이 가리키는 방향만은 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소월."
"네."
"내일 백로암으로 갑시다."
남소월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사람 얼굴이 좀 됐네요."
"전에는 아니었습니까?"
"전엔 늘 누군가랑 싸우는 얼굴이었죠."
그녀는 잠시 서문진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지금은 자기 자신과는 덜 싸우는 얼굴이에요."
서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천천히 창해의 잔검을 거두었다.
검심은 손에 있지 않았다.
이제야 그 말이, 비로소 몸 안쪽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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