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야행단

피 냄새를 품은 빗방울
비는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한 방울, 두 방울. 지붕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골목 돌바닥에 어두운 점을 찍더니, 금세 낙양의 밤 전체를 적시기 시작했다. 방금 전 바닥에 박힌 비도 자루 끝의 붉은 천도 물을 머금고 축축하게 늘어졌다.
서문진은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지붕 위 그림자 셋은 사람처럼 서 있었지만, 사람 냄새가 적었다. 숨결도, 망설임도, 괜한 위세도 없었다. 마치 밤이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들고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남소월이 아주 낮게 말했다.
"눈부터 가져가려 들 거예요."
"무서운 말을 참 침착하게 하는군요."
"위로 아니에요. 조언이에요."
말이 끝나자마자 첫 번째 비도가 날아왔다.
정면이 아니었다. 왼쪽 담벽을 한 번 스치고 궤적을 꺾어 들어왔다. 젖은 돌벽과 비를 이용한 수법이었다. 서문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얇은 바람이 귀를 베듯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림자 둘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탕, 탁.
착지 소리는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 둘 다 검은 옷에 짧은 소매 차림이었고, 손에는 폭이 좁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한 번 크게 겨루는 무인의 칼이 아니라, 좁은 곳에서 붙어 찌르고 사라지는 살수의 칼이었다.
세 번째 그림자는 여전히 지붕 위에 남아 있었다.
서문진은 그 배치를 보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둘은 몰아붙이고 하나는 위에서 누르는군."
남소월이 뒤로 반 걸음 미끄러지며 답했다.
"죽이려는 것보다 잡아 가려는 쪽에 가까워요."
그 말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첫 번째 살수가 낮게 들어왔다. 다리를 묶으려는 수였다. 둘째는 같은 순간 상반신으로 붙었다. 서문진은 낡은 검을 짧게 세웠다.
철컥.
단도를 받아 내자 손목을 타고 둔한 진동이 올라왔다. 그는 발을 반 칸 뒤로 빼며 검등으로 다른 놈의 손등을 툭 쳤다. 깊게 벤 건 아니었다. 다만 흐름을 어긋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빗물 위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그런데 서문진의 몸은 오히려 그 미끄러짐을 타고 옆으로 빠졌다. 천학문 외원에서 배운, 다들 쓸모없다 비웃던 작은 보법이었다. 넓은 비무대에선 초라했지만, 좁고 젖은 골목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가 힘을 싣는 방향을 반 치만 비껴 버리면, 쫓아오던 칼이 먼저 중심을 잃었다.
한 놈의 어깨가 담장에 부딪쳤다.
그 순간 남소월이 움직였다. 그녀는 바닥에 박힌 첫 비도를 뽑아 들더니, 살수를 향해 던지지 않고 옆의 등롱을 향해 찔렀다.
퍽.
종이 등롱이 터지며 기름 먹은 불꽃이 번졌다. 크게 타오르진 않았지만, 젖은 밤 속에서 그 정도 불빛도 눈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살수 하나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서문진의 검끝이 그의 팔뚝을 스쳤다.
짧은 신음.
하지만 물러서기만 할 뿐, 무너지진 않았다.
지붕 위 그림자가 이번엔 가는 쇠침 셋을 쏘아 내렸다. 두 개는 검으로 튕겨 냈지만, 하나가 담벽에 박히며 검푸른 액을 흘렸다.
독이었다.
남소월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맞네요."
"뭐가 말입니까?"
"혈우야행단."
이름은 참 그럴듯했다. 핏빛 비를 몰고 다니는 밤의 행인들.
서문진은 혀끝으로 피 맛을 삼켰다.
"이름값은 제대로 하는군요."
"실물은 별로죠?"
"아주 형편없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틀었다. 여기서 오래 버티면 위에서 독침이 쏟아지고, 아래에서 단도가 달라붙을 것이다. 싸워 이기는 것과 살아 나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남소월이 말했다.
"시장 쪽으로 가요. 사람 많은 데로."
"보통은 한적한 곳으로 피하지 않습니까?"
"저놈들은 한적한 데서 더 잘 죽여요."
이상하게도 그 말은 아주 믿음직했다.
둘은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시장길 위의 검은 발자국
낙양의 야시장도 비 앞에서는 완강하지 못했다.
좌판마다 덮개를 내리고 있었고, 상인들은 물건을 끌어안은 채 악다문 얼굴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문을 닫기엔 늦은 시각도 아니었다. 여기저기 남은 등불이 젖은 길을 흔들고 있었고, 튀김 기름 냄새와 생선 비린내, 젖은 말가죽 냄새가 한데 섞여 떠돌았다.
서문진과 남소월이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뒤에서는 검은 그림자들이 조금도 급하지 않게 따라붙었다.
그게 더 섬뜩했다.
쫓는 자가 허둥대지 않는다는 건, 도망칠 길까지 계산해 두었다는 뜻이니까.
"이상합니다."
서문진이 뛰며 낮게 말했다.
"아까부터 급소를 노리는 수가 적어요."
"그러니까 살려 데려가려는 거죠."
"왜?"
남소월이 비를 털듯 짧게 답했다.
"주문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쪽 좌판 뒤에서 또 다른 칼빛이 솟았다.
서문진은 그대로 몸을 낮췄다. 위에서 날아든 비도와 앞에서 튀어나온 단도가 허공에서 엇갈렸다. 뒤쫓던 놈들만이 아니었다. 앞길에도 이미 손을 심어 둔 것이다.
"성실한 놈들이군!"
"직업정신이 투철하죠!"
남소월이 좌판 하나를 걷어찼다. 나무상 위에 쌓여 있던 대추와 밤이 우르르 쏟아져 젖은 바닥을 굴렀다. 그 위를 밟고 뛰어들던 살수 하나가 균형을 잃었다.
서문진의 검끝이 번쩍였다.
이번엔 검등이 아니라 날이었다. 깊지는 않았지만 허벅지를 가르기엔 충분했다. 검은 옷이 찢기고 피가 빗물에 섞여 흘렀다. 돌바닥을 타고 번지는 붉은 물줄기를 보는 순간, 혈우야행단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놈들은 정말 비 오는 밤을 고른다. 피도, 흔적도, 비명도 비가 빨리 씻어 주니까.
하지만 이 밤엔 계산이 조금 어긋났다.
시장 가운데 작은 다리로 들어섰을 때였다. 지붕 위를 옮겨 뛰던 살수 하나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그대로 몸을 굴렸다. 목덜미에서 검은 손잡이의 침 하나가 비죽 솟아 있었다.
쿵.
시체가 다리 난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남소월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건 저놈들 수법이 아니에요."
서문진이 반대편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빗속에서 회색 그림자 하나가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검은 옷도, 붉은 천도 아니었다. 누군가 혈우야행단을 향해 암기를 날린 뒤 곧장 자취를 감춘 것이다.
뒤쫓던 살수 둘도 그걸 본 모양이었다. 움직임이 아주 잠깐 흐트러졌다.
서문진은 그 찰나를 파고들었다. 검집으로 하나의 턱을 올려치고, 몸을 틀어 다른 하나의 손목을 밀어냈다. 남소월은 그사이 다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죽은 살수의 허리춤을 뒤졌다.
"뭘 찾는 겁니까?"
"죽었어도 주머니는 남잖아요."
"그 말, 듣기 무섭군요."
"살아 있는 놈보다 덜 귀찮아요!"
다시 쇠침이 쏟아졌다. 이번엔 혈우야행단 쪽이었다. 서문진은 검을 크게 휘둘러 두 개를 튕겨 냈고, 남소월은 다리 기둥 뒤로 몸을 감췄다.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작은 청동패 하나와 기름 먹인 종이말이였다.
"찾았어요. 뛰어요!"
물러설 때였다. 시장을 뒤덮는 고함과 빗소리 사이에서, 누가 누구를 쫓는지도 모를 혼란이 커졌다. 혈우야행단은 그대로 추격을 이어 왔고, 정체 모를 제삼자도 어둠 속에서 그들을 함께 노리고 있었다.
둘은 다리를 건너 동쪽 창고 거리로 몸을 날렸다.
주문서는 둘이었다
비를 간신히 막아 주는 처마 아래에 들어선 뒤에야 둘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창고 거리는 반쯤 비어 있었다. 젖은 짚 냄새와 곡물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낡은 수레 하나가 뒤집힌 채 빗물을 받고 있었다. 멀리선 아직 시장 쪽 소란이 들렸지만, 여긴 잠시 세상 밖처럼 고요했다.
남소월은 청동패와 종이말이를 펼쳤다.
청동패 앞면에는 붉은 천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뒷면에는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행 삼조.
"분대 이름인가 보군요."
"혈우야행단이 생각보다 크다는 뜻이죠."
남소월은 기름종이를 조심히 풀었다. 먹물이 번지지 않도록 처리된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살려 데려올 것. 반옥 회수. 동문 밖 인계.
서문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역시 산 채로 데려가려는 명령이군."
"아직 끝이 아니에요."
종이 아래쪽에는 다른 먹색으로 덧쓴 문장이 있었다.
불가할 시, 옥패만 취할 것.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비 소리만 처마를 두드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서문진이었다.
"같은 주인이 마음을 바꾼 것 아닙니까?"
남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글씨가 달라요. 하나는 명령처럼 짧고 딱딱하고, 다른 하나는 거래 조건을 적는 방식이에요. 사람을 원한 쪽과, 물건만 원한 쪽이 달라요."
"하나는 나를, 하나는 옥패를."
"그리고 아까 회색 그림자까지."
남소월이 종이를 접었다.
"최소 셋이에요."
서문진은 처마 바깥의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강호의 밤은 아까 백등루에서 들은 이야기보다 더 복잡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정파 윗선 어딘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는 반옥을 통째로 손에 넣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사람째 확보해 입을 막거나 쓰려 했으며, 또 누군가는 혈우야행단 같은 바깥 칼을 제거하면서까지 뒤를 가리고 있었다.
칼이 한 줄기일 때는 피하면 됐다.
하지만 칼이 세 줄기면, 어디로 피해도 다른 칼끝과 마주친다.
그때 처마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문진의 검끝이 즉시 어둠을 겨눴다. 남소월도 청동패를 쥔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비를 헤치고 들어온 것은 검은 옷의 살수 하나였다. 아까 시장에서 서문진이 허벅지를 벤 자였다.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놈은 입가에 얇은 웃음을 걸고 섰다.
"잘 뛰는군."
"그렇게 칭찬해 줄 거면 쫓아오지 말지."
서문진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살수는 어깨를 기대듯 기둥에 몸을 붙였다.
"쫓는 게 일이거든."
남소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누가 보냈지?"
"값 낸 자."
"그게 누군데?"
"우린 얼굴을 묻지 않아."
남소월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 너희는 얼굴 대신 냄새를 기억하잖아. 말투, 칼집, 신발 바닥, 따라오는 호위의 수. 의뢰인을 모르면 오래 못 살아."
살수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 미세한 변화 하나로도 충분했다.
"아는구나, 꼬마."
"기뻐할 시간 없어 보여요."
남소월의 시선이 그의 허벅지 상처로 내려갔다.
"독은 우리 쪽만 묻힌 게 아니죠?"
살수는 짧게 웃었다가 기침을 터뜨렸다. 검붉은 피가 빗물에 섞여 떨어졌다.
"오늘 밤 우릴 쓴 자와, 우릴 죽이려는 자가 달라."
서문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동문 밖 인계장은 미끼다."
"누구를 끌어내려는 미끼지?"
살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비 소리 너머를 듣는 사람처럼.
"우릴 쓴 쪽은 네 옥패를 원하고, 다른 쪽은 그걸 아는 놈들까지 다 묻으려 해."
남소월이 곧장 물었다.
"회색 옷?"
살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색을 보기도 전에 죽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운이 좋네."
그 순간,
쉭.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침 하나가 날아와 살수의 목에 꽂혔다.
놈은 더 웃지도 못했다.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무너졌다.
서문진은 즉시 처마 밖으로 튀어나갔다. 빗속 골목 끝, 창고 지붕 위로 회색 그림자 둘이 미끄러지듯 물러나는 게 보였다. 빠르다기보다, 아예 비에 섞여 버리는 움직임이었다.
"서문진!"
남소월의 외침이 뒤에서 날아왔다.
그는 추격하려던 발을 멈췄다.
멈추지 않았다면, 아마 그다음 순간 머리 위 그물이나 독침을 맞았을 것이다. 골목 바닥에 얇은 쇠줄 두 가닥이 어느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비 때문에 보이지 않던 함정이었다.
남소월이 처마 아래에서 혀를 찼다.
"쫓는 놈도 많고, 막는 놈도 많네요."
서문진은 천천히 돌아왔다.
살수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확실하군."
"뭐가요?"
"날 쫓는 쪽은 하나가 아니다."
남소월도 같은 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옥패를 원하는 이유가 서로 다르죠."
비는 흔적을 지우고, 사람은 말을 남긴다
둘은 시체를 다시 뒤졌다.
목숨은 끊어졌지만, 남겨진 물건은 아직 말을 하고 있었다. 허리춤 안쪽에서 나온 건 얇은 은전 두 닢, 낡은 침낭 조각, 그리고 젖은 종잇조각 하나였다. 종이에는 절반쯤 번진 글씨가 남아 있었다.
서쪽 나룻터 창고. 이경 삼점. 회수 후 즉시 이동.
남소월이 조용히 말했다.
"동문 밖 인계가 진짜가 아니었네요."
"아니면 처음부터 두 갈래였겠지."
"한쪽은 혈우야행단에게 우리를 동문으로 몰게 하고, 다른 한쪽은 서쪽에서 기다렸을 수도 있어요."
서문진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참 친절한 세상이군. 방향마다 적을 놓아 주다니."
남소월도 웃었다.
"인기가 많네요."
"그건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저도요."
잠깐의 농담 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처음엔 골목 하나를 적시던 비가 이제는 낙양 전체를 감싸는 장막처럼 느껴졌다. 그 장막 뒤에 몇 개의 손이 숨어 있는지, 어느 손이 칼을 쥐고 어느 손이 줄을 당기는지 알 수 없었다.
서문진은 품 안의 반옥을 손끝으로 눌렀다.
작은 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작은 것이 객잔의 피를 부르고, 낙명곡의 추격을 부르고, 정파 윗선의 속삭임을 부르고, 이제는 혈우야행단과 정체 모를 회색 그림자들까지 부르고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좋은 뜻으로 넓어진 건 아니었다. 자신이 서 있는 바닥 아래에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렁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아는 기분에 가까웠다.
남소월이 물었다.
"겁나요?"
서문진은 대답하지 않다가, 이내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잘됐네요."
"그게 왜 잘된 겁니까?"
"안 무서우면 무모해지거든요."
그녀는 청동패를 소매 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객잔 싸움이나 비무대하고 달라요. 누가 옳은지 따질 시간도 없이 칼이 먼저 들어올 거예요. 그런데도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누가 무슨 이유로 우릴 쫓는지는 알아야 해요."
서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반옥 자체를 원하고."
"하나는 당신까지 필요해 하죠."
"그리고 회색 놈들은?"
남소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을 막는 쪽일 수도 있고, 제일 오래 숨은 진짜 주인일 수도 있어요."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군요."
"축하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 진짜 강호 한복판에 들어온 거예요."
서문진은 빗속 어둠을 바라보았다.
백등루의 불빛 아래서 들은 이름들은 이미 충분히 골치 아팠다. 그런데 그 불빛 밖으로 한 걸음만 나오자, 이름 없는 칼들이 더 많았다. 정파의 명분, 표국의 이해, 사라진 감찰 기구의 그림자, 밤을 떠도는 살수들, 그리고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손.
이제 싸움은 더 이상 자신과 남소월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 오래전 묻어 둔 비밀이 강호 전체를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징 소리가 울렸다. 성문을 알리는 야경의 소리였다. 비를 타고 퍼지는 둔한 금속음이 밤의 끝을 알렸지만, 이상하게도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은 옅어지지 않았다.
남소월이 먼저 몸을 돌렸다.
"여기 오래 있으면 다음 손님이 와요."
"서쪽 나룻터로 갑니까?"
"바로는 안 가요. 다만 누가 기다리는지는 확인해야죠."
"거기에도 우리를 잡으러 온 놈들이 있겠군요."
"아마도요."
"그리고 없는 척 숨어 있는 놈들도."
"그쪽이 더 귀찮죠."
서문진은 시체 옆에 떨어진 붉은 천 조각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빗물에 젖은 붉은색이 돌바닥 위에서 피처럼 번지고 있었다.
오늘 밤은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한 무리의 살수를 막아 냈을 뿐인데, 도리어 자신들을 노리는 세력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만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런 진실은, 때때로 칼보다 더 차갑다.
그는 검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갑시다. 다음엔 누가 우릴 기다리는지 보죠."
남소월이 처마 밖으로 먼저 나섰다.
"좋아요. 다만 하나는 기억해 둬요."
"뭡니까?"
그녀는 빗속에서 돌아보며 씩 웃었다.
"오늘 밤 우릴 죽이려던 놈들이 서로 같은 편은 아니었다는 것."
서문진도 그제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낙양의 지붕과 골목, 성문과 창고, 다리와 강가를 모조리 적시는 그 비 아래에서, 강호의 추적자들은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노리는 것은 단지 옥패 반쪽만이 아니라, 그 옥패가 열어 줄 오래된 문 너머의 무엇이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빗속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뒤에 남은 것은 시체 하나, 붉은 천 조각, 그리고 흔적을 지우는 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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