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일방의 그림자

백등루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낙양의 밤은 낮보다 더 시끄러웠다.
특히 백등루 앞은 그랬다. 누각마다 걸린 등롱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붉고 누런 빛이 길바닥 위로 쏟아졌고, 말에서 내리는 무인들의 그림자는 그 빛 사이를 길게 잘라 갔다. 문 앞에는 각 문파와 방파의 시종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옷자락에서는 향냄새와 약냄새, 그리고 금방 닦은 병장기 냄새가 뒤섞여 났다.
서문진은 초대패를 손안에서 한 번 굴렸다.
백등.
낮에는 작은 나무패였는데, 밤이 되니 묘하게 무거워 보였다.
그 옆에서 남소월이 말했다.
"들어가면 입보다 눈을 먼저 쓰세요."
"항상 하는 말 같군요."
"항상 중요한 말이기도 하죠."
"당신은요?"
"나는 눈도 쓰고, 귀도 쓰고, 필요하면 발도 쓸 거예요."
서문진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은 곧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뜻이군요."
"축하해요."
남소월이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점점 나를 잘 알아 가네요."
문지기가 패를 확인하고 길을 열어 주었다.
백등루 안은 바깥보다도 더 환했다. 넓은 대청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탁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좋은 비단을 입은 젊은 제자들과 문파의 장로들, 표국의 주인들, 무림맹 하급 집사들까지 뒤섞여 앉아 있었다. 웃음소리는 높았고 술잔은 자주 오갔다. 겉으로만 보면 강호의 성대한 잔치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웃음의 결이 달랐다.
반가워서 웃는 사람보다, 먼저 웃어 상대를 재는 사람이 더 많았다.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는지, 누가 먼저 이름을 불리는지, 누가 술을 권하고 누가 거절하는지. 칼을 뽑지 않아도 싸움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남소월이 조용히 속삭였다.
"보이나요?"
"사람이 많다는 건 보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녀는 턱으로 안쪽 자리를 가리켰다.
가장 높은 자리에는 이름난 정파 원로들이 앉아 있었다. 회색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승려 차림의 중년인, 깃이 각 잡힌 도포를 입은 검객, 그리고 낮에 서문진을 내려다보던 검은 비단 차림의 중년인까지.
그의 허리에는 여전히 그 장식이 달려 있었다.
구름을 가르는 검.
낯설지 않은 문양이었다.
서문진의 시선이 잠시 굳자 남소월이 아주 낮게 말했다.
"저 사람, 봤죠?"
"낮에 차양막 아래 있던 자."
"맞아요. 이름은 연자평. 낙양 맹회 집법당 쪽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소문?"
"강호에선 확실한 말보다 소문이 더 빨리 움직이거든요."
서문진은 연자평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집법당 사람 허리춤에 왜 옛 천학문 문양이 달려 있습니까?"
남소월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입꼬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거예요."
서문진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백등루의 불빛은 환했지만, 그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할 만큼 반쯤만 보였다.
웃는 얼굴로 칼자루를 잡는 사람들
연회는 소란스러웠고, 소란스럽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드러났다.
한쪽에서는 화산 속가 제자들이 낮 비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개방 무리들이 장난처럼 서로의 잔을 바꿔 들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말끝마다 계산이 매달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호송 일은 어느 표국이 맡는다더냐?"
"맹회 쪽에서 아직 결정을 안 내렸답니다."
"안 내린 게 아니라 못 내린 거겠지. 서쪽 길 세금이 걸려 있는데."
"쉿. 그런 말은 술자리에서 하는 거 아니다."
"술자리라서 하는 거지."
서문진은 술시중 드는 하인처럼 움직이며 탁자 사이를 천천히 돌았다. 남소월은 어느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다. 겉으로는 자연스러웠지만, 서문진은 안다. 저 소녀는 사람 사이를 스치는 척하면서도 필요한 말만 골라 듣고 있다.
그때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백이강이었다.
화산 속가의 흰 옷을 갈아입은 그는 낮의 비무대 위와 다를 바 없이 말수가 적어 보였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더 이름 있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서문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백이강도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상처는 괜찮소?"
"죽진 않았습니다."
"그 말은 이미 들은 것 같군."
서문진이 웃었다.
"다른 좋은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요."
백이강의 시선이 잠깐 주위를 훑었다. 그 짧은 움직임이 괜히 가볍지 않았다.
"오늘 밤은 무대보다 발밑을 더 조심하시오."
"그건 비무대에서도 쓸 만한 충고였습니다."
"여긴 미끄러지는 이유가 다르오."
딱 그 말만 남기고 백이강은 등을 돌렸다.
서문진은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말없이 술병을 옮기는 척 옆자리로 움직였다.
곧 연회 중앙에서 누군가 잔을 높이 들고 입을 열었다. 회색 수염 노인이었다.
"오늘 낙양 비무대회에 모인 젊은 영웅들에게 축하를!"
사방에서 잔이 들렸다.
"협은 칼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오. 강호가 어지러울수록 정파는 더 굳게 손을 맞잡아야 하오!"
좋은 말이었다.
정말로 흠잡을 곳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옆 탁자에서 작은 실랑이가 붙었다.
"왜 우리 자리엔 술이 늦지?"
"개방 장로 쪽이 먼저 들어오셔서…"
"먼저 들어왔으면 먼저 마시고, 늦게 왔으면 늦게 마셔야 하나? 우리 청하표국이 이번 서쪽 호송을 얼마나 맡았는지 아느냐?"
그 말에 다른 쪽에서 코웃음이 났다.
"호송 몇 번 했다고 정파 잔치에서 목소리가 커지는군."
"그럼 은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나?"
웃는 얼굴, 낮은 목소리, 그러나 손은 이미 칼자루 가까이에 가 있었다.
서문진은 문득 천학문 외원에서 배운 것이 아주 작은 세상의 법칙일 뿐이었다는 걸 다시 느꼈다. 여기도 똑같다. 다만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그럴듯한 명분을 붙였을 뿐이다.
남소월이 어느새 그의 옆에 나타났다.
"이제 좀 보여요?"
"무슨 뜻인지."
"구파일방."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커다란 한 덩어리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 다른 계산서를 품고 있죠."
"정파의 연맹이 아니라 장사꾼 모임처럼 들리는군요."
"전쟁도 돈 없이 못 하고, 협도 밥 없이 못 해요."
남소월은 아주 담담했다.
"누군가는 그걸 추악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현실이라고 하죠."
서문진은 잠시 침묵했다.
낮에 비무대에서 본 젊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어떤 이는 곧고, 어떤 이는 교만했고, 어떤 이는 묵묵했다. 그런데 그들이 속한 자리의 위쪽으로 올라오니, 말보다 이해관계가 더 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 남소월이 그의 소매를 가볍게 건드렸다.
"봐요."
연자평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회색 수염 노인과 승려 하나, 도포 차림의 장년인 둘이 함께 움직였다. 웃음은 여전히 대청에 남아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사람들은 웃음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소월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큰 이야기는 늘 문 닫힌 방에서 시작돼요."
"그리고 대개 귀찮은 일도 거기서 시작되죠."
"이쯤 되면 당신도 제법 똑똑하네요."
서문진은 한숨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그 칭찬,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문 하나 너머의 정의
백등루 이층은 아래보다 더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건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웃음소리가 줄어든 자리를 속삭임이 대신 채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벽마다 걸린 산수화와 병풍은 고요해 보였지만, 그 뒤편에서는 발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가 예민하게 울렸다.
남소월은 망설임 없이 가장 안쪽 회랑으로 향했다. 그 끝에는 붉은 칠을 한 큰 문이 있었고, 문 앞에는 검을 찬 호위 둘이 서 있었다.
"저긴 못 지나가겠군요."
서문진이 입술만 움직였다.
"정면으로는요."
남소월이 그보다 더 작은 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옆으로 몸을 틀어 비워진 술상 하나를 밀었다. 회랑 끝 병풍 뒤에는 예상보다 좁은 틈이 있었고, 그 너머로 얇은 나무살 창이 나 있었다. 환기용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 귀를 시험하려고 만든 건지 모를 자리였다.
둘은 몸을 낮추고 그 앞에 붙었다.
안쪽 방에서는 이미 말이 오가고 있었다.
먼저 들린 것은 회색 수염 노인의 목소리였다.
"낙명곡 일은 더 퍼져선 안 되오."
서문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방 안의 다른 이가 낮고 마른 목소리로 받았다. 연자평이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잡역 차림의 그 애송이 말인가?"
"애송이라도 살아남은 입은 입이지요."
이번에는 승려의 목소리가 섞였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없애자는 말은 하지 맙시다. 정파가 그리 가벼운 길을 걸어선 안 됩니다."
그 말에 누군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에 더 가까웠다.
"혜운 대사, 세상이 경전 구절대로만 굴러가면 좋겠지요. 하지만 반옥이 세상에 드러나면 구파일방부터 갈라질 겁니다."
"갈라질 일을 저지른 자가 따로 있을 텐데, 왜 사실을 감춥니까?"
"사실은 칼보다 사람을 많이 죽이는 법이오."
짧은 침묵.
서문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연자평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반옥은 단순한 옥조각이 아닙니다. 옛 천학문의 봉인지요. 그 안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여기 모인 분들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도포 차림의 장년인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봉인된 검각의 증표, 그리고 그 시절 맺어진 약정문."
다른 이가 덧붙였다.
"약정문만 문제가 아니오. 그 안의 물건까지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맹회의 힘이 기울 수 있소."
"그러니 더더욱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거요."
"함부로?"
이번에는 회색 수염 노인이 비웃듯 말했다.
"낙명곡에 사람을 보낸 쪽이 그런 말을 하는군."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진 게 밖에 있는 둘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뒤 연자평이 천천히 말했다.
"보낸 건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알고는 있었겠지."
"모르고서 여기 앉아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서늘했다.
서문진의 손등에 힘이 들어갔다.
낙명곡. 그 밤의 추격. 객잔에서부터 이어진 피 냄새. 그 모든 일이 방 안의 사람들 입에서는 마치 장부 한 줄 정리하듯 가볍게 오가고 있었다.
그때 승려, 혜운 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소. 반옥을 회수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소. 그러나 그것이 살수를 쓰고, 죄 없는 자까지 베어 넘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오."
"죄 없는 자?"
도포 차림의 장년인이 차갑게 말했다.
"강호에서 그런 말은 대개 너무 늦게 나온다오."
"그래서 다들 늦은 척하는 겁니까?"
그 한마디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서문진은 뜻밖에 그 승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어도 저 사람은 선을 넘는 걸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면, 그 역시 반옥을 회수해야 한다는 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누구도 깨끗하진 않았다.
다만 더럽혀지는 이유가 서로 달랐다.
연자평이 탁자 위에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문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절반도 움직이고 있어요."
"윤서린?"
"그 여자 하나만이 아니지요."
"그럼?"
"반옥을 노리는 이들은 셋입니다. 지키려는 자, 숨기려는 자, 팔아버리려는 자."
회색 수염 노인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자네는 어느 쪽이지?"
연자평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끝까지 살아남는 쪽입니다."
서문진은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칼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저울을 다는 인간이다. 그런 자가 더 무섭다. 검기가 강해서가 아니라, 자기 손에 피가 묻는 계산까지 미리 끝내는 부류니까.
그때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정파 이름으로는 움직이기 어렵다면 바깥손을 쓰면 될 일."
"설마."
혜운 대사의 목소리가 굳었다.
"그 이름까지 꺼낼 셈이오?"
도포 차림의 장년인이 말했다.
"밤에 젖으면 옷이 다 같은 색이 되지. 누가 칼을 쥐었는지까지 보는 자는 많지 않소."
연자평이 조용히 물었다.
"혈우야행단을 부르자는 뜻입니까?"
방 안 공기가 다시 한 번 무거워졌다.
서문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남소월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걸 느꼈다.
회색 수염 노인이 낮게 말했다.
"정파는 명분을 잃어선 안 되오."
그러자 누군가 피식 웃었다.
"명분은 앞문으로 들어가고, 일은 늘 뒷문으로 끝나는 법이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문진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의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의 바깥의 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방 안에는 끝까지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부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골치 아팠다.
악인은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선인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누가 악인인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이만 가야 해요."
남소월이 거의 숨결만으로 말했다.
서문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지막 말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웠다.
안쪽 방에서 혜운 대사가 단호히 말했다.
"나는 그런 방식엔 이름을 빌려주지 않겠소."
회색 수염 노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대사, 그 강퍅함은 존중하오. 하지만 맹회가 무너지면 죽는 건 우리 체면이 아니라 아래쪽 사람들일 수도 있소."
"그래서 몇을 베어 열을 살리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면."
"그 말이 누군가에겐 언제나 편리하지."
짧고 날선 말들이 오갔다.
서문진은 문득 방 안의 누구를 더 미워해야 할지 헷갈렸다. 살수를 입에 올린 자는 분명 미웠다. 그런데 더 큰 싸움을 막겠다고 이를 악물고 현실을 택하는 자를 향해서는, 단번에 칼을 들이대기도 어려웠다.
그가 알고 있던 세상은 더 단순했다.
나를 쫓는 놈, 나를 돕는 사람.
하지만 강호는 그런 식으로만 나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를 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결국 같은 자리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뒤쪽 회랑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였다.
남소월의 눈빛이 변했다.
늦었다.
"누구냐?"
문 앞 호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서문진은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남소월은 병풍 반대편으로 먼저 미끄러져 나갔다.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발은 이미 같은 방향을 골랐다.
회랑은 좁았다.
그 사실이 이번만큼은 반가웠다.
뒤에서 호위 둘이 쫓아오자 서문진은 계단 앞 난간 쪽으로 달리다가 마지막 순간 몸을 비틀었다. 넓은 대청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가기도 버거운 복도였다. 상대의 검이 뽑히는 공간이 짧아지는 바로 그 자리.
첫 번째 호위가 검집째 밀어붙이듯 들어오자 서문진은 몸을 반 칸 옆으로 틀었다. 검날이 완전히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의 낡은 검이 상대 손목 아래를 툭 쳤다. 베는 검이 아니라 흐름을 꺾는 짧은 수였다.
호위의 손끝이 흔들리는 사이, 남소월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소매를 당겼다.
"지금은 이겨도 귀찮아요!"
"당신 말은 늘 핵심만 찌르는군요!"
둘은 계단을 뛰어내렸다.
아래층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다만 이층에서 들린 고함 때문에 몇몇 시선이 이미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소월은 사람 많은 쪽이 아니라 주방으로 통하는 좁은 측문을 택했다.
그 문 앞에서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백이강이었다.
서문진은 본능적으로 검을 반쯤 들었다가 멈췄다. 백이강의 눈빛이 짧게 둘을 훑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한순간이었다.
백이강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반 보 옮겨 문 앞을 비워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돌아서서 뒤쪽으로 걸어 나갔다.
막 계단을 내려오던 호위가 그를 보고 외쳤다.
"거기! 못 보셨소?"
백이강은 아주 무심하게 대답했다.
"취객 둘이 비틀거리더군."
"어디로 갔소?"
"낙양의 술 취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야 늘 많지 않소."
호위가 이를 갈았지만, 화산 속가의 제자에게 대놓고 밀어붙일 수는 없는 듯했다.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남소월과 서문진은 측문을 빠져나와 백등루 뒤 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와 문 열리는 소리가 겹쳐 들렸지만, 어둠 속으로 한 번 스며들고 나자 쫓는 발은 더뎌졌다.
둘은 골목 끝 폐가 담장 아래까지 달리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서문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파 연회란 게 원래 이렇게 살벌합니까?"
남소월도 숨은 차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했다.
"살벌하지 않으면 강호 윗사람들 모임이 아니죠."
"오늘 아주 여러 가지를 배우는군요."
"표정이 그래요."
서문진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등루의 높은 불빛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골목은 어두웠고, 어둠이 더 정직하게 느껴졌다.
"방 안 사람들 중 누가 제일 나쁜 놈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소월은 잠시 그를 보았다.
"정답이에요."
"그게 왜 정답입니까?"
"쉽게 보이면 쉬운 싸움이겠죠. 하지만 강호의 큰일은 대개, 아주 나쁜 놈 몇보다 적당히 옳고 적당히 비겁한 사람들 때문에 더 오래 끌려요."
그 말이 기분 나쁘게도 맞았다.
서문진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혜운 대사의 반대도 떠오르고, 회색 수염 노인의 '아래쪽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도 떠올랐다. 거짓 같으면서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연자평의 말은 가장 차가웠지만, 어쩌면 저자가 제일 솔직한 인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싫었다.
빛 아래 드러난 이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칼
남소월이 품 안에서 접힌 얇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서문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그 와중에 또 챙겼습니까?"
"빈손으로 쫓기는 건 억울하잖아요."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고마워요."
"칭찬 아닙니다."
"알아요."
그녀는 종이를 펼쳤다. 등불은 없었지만 골목 끝 달빛이 조금 비쳤고, 남소월은 그 희미한 빛만으로도 글자를 읽어 냈다.
종이 위에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청운감찰 인계 목록.
그 아래에는 몇 개의 이름과 물건 명칭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은 서문진에게 낯선 글자였다. 하지만 맨 아래 두 줄은 달랐다.
봉인 검각 잔검 일곱.
천학문 반옥 증표, 미회수.
서문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청운감찰?"
남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이름이에요. 옛날 구파일방이 서로를 감시하고, 봉인물을 인계할 때 쓰던 비밀 기구."
"감찰?"
"겉으론 협력, 속으론 견제."
그녀가 종이를 접었다.
"연자평 허리의 문양이 왜 낯익었는지 이제 알겠죠?"
서문진은 입술을 굳혔다.
옛 천학문의 문양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천학문이 그 비밀 기구와 얽혀 있었다는 뜻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옥은 단지 도망치는 자의 짐이 아니었다. 정파 윗선이 감추고 싶어 하는 오래된 열쇠였다.
"봉인 검각은 뭡니까?"
"이름만 보면 칼 냄새가 나죠."
"지금 농담할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때도 가끔 농담이 필요해요."
남소월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예요. 반옥이 열어 줄 건 단순한 장소 하나가 아니에요. 누군가에겐 무공의 흔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옛 약정문일 수도 있죠. 그래서 다들 제 손으로 가져야 안심하는 거예요."
서문진은 조용히 말했다.
"지키려는 놈도, 숨기려는 놈도, 차지하려는 놈도 모두 정파 안에 있다는 말이군."
"아마도요."
"그럼 마교니 사도니 하는 말은?"
남소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꺼내 드는 쉬운 이름이죠. 사람들은 복잡한 진실보다 편한 적을 좋아하니까."
서문진은 그 말에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을 쫓는 칼의 정체를 알면 세상이 조금은 분명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베일을 한 겹 벗기고 보니, 칼은 더 많아졌고 주인도 흐려졌다.
그때였다.
퍽.
무언가가 둘 사이 바닥에 꽂혔다.
짧은 비도 하나가 돌바닥 틈에 박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루 끝에는 젖은 붉은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위로 향했다.
골목 끝 지붕 위, 어둠이 한 덩이 모여 선 것 같은 그림자 셋이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옷은 검었다. 다만 비도 자루에 묶인 붉은 천만이 희미한 달빛에도 또렷했다.
남소월의 표정이 아주 천천히 굳었다.
서문진이 낮게 물었다.
"아까 그 이름?"
남소월도 똑같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예."
지붕 위 그림자 하나가 아주 느리게 손을 들었다. 손끝에 또 다른 비도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낙양의 밤하늘에서 가느다란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남소월이 말했다.
"서문진."
"압니다."
그는 낡은 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백등루의 불빛은 멀었고, 골목은 좁았고, 적은 아직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분명했다.
오늘 밤 그들이 엿들은 이야기는, 이미 누군가의 칼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붉은 천이 바람에 젖으며 작게 흔들렸다.
핏빛 비를 예고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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