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쓸모없는 검법의 진가

쓸모없는 검법의 진가

낡은 책자에는 대단한 비밀 따위가 없었다

그날 밤, 서문진은 하방 구석에 등을 기대고 소매 속에서 책자를 꺼냈다.

등잔불이 약해 글자가 절반쯤 그림자에 잠겼다. 표지는 이미 여러 번 젖었다 마른 흔적이 있었고, 실로 꿰맨 자리도 두 군데나 풀려 있었다. 그는 괜히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곧 김이 빠졌다.

거기 적힌 것은 놀라운 비전도, 천지를 뒤흔드는 절세검법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외원의 어린 제자들에게나 가르칠 법한 너무 단순한 동작들뿐이었다.

검을 들어 올린다.

옆으로 걷어낸다.

아래를 막는다.

짧게 찌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름도 시시했다. 운룡탐조 같은 멋들어진 초식명은 없고, 전부 상막, 하막, 평참, 직자 같은 식이었다. 듣기만 해도 하품이 나올 만한 이름이었다.

서문진은 책자를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건 검법이 아니라 장부 아닙니까?"

옆 평상에서 뒤척이던 만복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책 보고 잠 안 오면 성공한 거다."

"안 오는 게 아니라 도망갔습니다."

"그럼 더 성공했네."

만복은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서문진은 헛웃음을 흘리고 다시 책에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한 장, 두 장 넘길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이 검식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꼼꼼했다. 발을 어디에 두는지, 손목을 얼마나 틀어야 하는지, 검 끝보다 손등의 높이를 어떻게 맞추는지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한 줄이 자꾸 눈에 걸렸다.

'검로를 길게 쓰지 말 것. 약한 자는 돌아오는 길에 죽는다.'

서문진은 그 문장을 한참 보고 있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 하나쯤은 제대로 패 본 문장이었다.

다음 장에는 더 이상한 말도 있었다.

'먼저 베려 하지 말고 먼저 빈틈을 닫아라.'

'상대를 보지 말고 상대가 오고 싶은 길을 보아라.'

'한 걸음 크게 나가면 한 걸음 크게 늦는다.'

서문진은 책장을 덮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너무 평범한데, 속에 든 말은 묘하게 뼈가 있었다. 마치 겉은 마른 나뭇가지인데 꺾어 보면 속심이 질긴 것처럼.

그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하방 뒤 빈터에는 달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제대로 된 검은 없으니 창고에서 함께 정리했던 낡은 목검 하나를 들었다.

첫 동작은 우스울 만큼 볼품없었다.

검을 들고, 발을 반 보 옮기고, 내리고, 거두고.

그뿐이었다.

하지만 열 번쯤 따라 하고 나자 곧 알게 되었다. 이 검법은 멋있게 보이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헛힘이 들어갈 자리를 모조리 없애 버린 검법이었다.

그 순간 서문진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을 위해 만든 무공도 있고, 이름난 제자들을 위해 준비된 비급도 있는데,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이런 검법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목검을 놓지 못했다.

쓸모없다는 말을 너무 오래 들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버려진 것 앞에서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되는 법이었다.

천재가 아니어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 뒤로 서문진은 낮에는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바닥을 쓸었다. 밤이 되면 사람들 코 고는 소리가 고르게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처음 사흘은 엉망이었다.

책자에 적힌 대로 반 보만 옮기면 자세가 어색했고, 검을 크게 휘두르지 말라고 하니 괜히 답답했다. 찌르기는 짧아서 닿지도 않을 것 같았고, 막는 동작은 너무 소심해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문진은 혼자 목검을 휘두르다가 툴툴거렸다.

"이래서 다들 안 본 거군. 보기에도 답답하고 해도 답답합니다."

답은 없었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는 이 검식이 왜 이렇게 짧고 왜 이렇게 아끼듯 움직이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물지게를 멜 때와 닮아 있었다.

걸음을 크게 떼면 물이 출렁이고, 힘으로 버티면 어깨가 먼저 망가진다. 짧고 고르게 걸어야 끝까지 간다.

장작을 팰 때와도 닮아 있었다.

힘만 세게 주면 도끼날이 비껴 나가고, 결을 읽어 넣으면 적은 힘으로도 나무가 갈라진다.

마보를 설 때와도 닮아 있었다.

버티려 들면 다리가 먼저 떨리고, 아래를 단단히 묶으면 숨이 길어진다.

그는 어느 날 목검을 든 채 멈춰 섰다.

검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 책자에 적힌 것은 그랬다. 이 낡은 검식은 검을 잘 휘두르는 법보다, 몸이 먼저 무너지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문진은 책자 뒷장에 연필 같은 것으로 눌러 쓴 희미한 메모를 발견했다.

'내력이 모자라면 더욱 짧게. 팔이 약하면 더욱 곧게. 눈이 느리면 상대의 칼이 아니라 어깨와 발을 보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좋군. 잘하는 놈들을 위한 말은 하나도 없어요."

그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천재는 한 번 보고 열을 익힌다고들 한다. 하지만 서문진은 한 번 보면 하나도 겨우 알까 말까 했다. 대신 그는 서툰 덕에 오래 보았다. 오래 본 덕에, 남들이 지나치는 것도 보았다.

이 검식은 빠른 검이 아니었다. 강한 검도 아니었다.

대신 돌아오는 길이 짧았다. 흐트러질 자리가 적었다. 헛되이 허공을 자르지 않았고, 막고 나서도 중심이 남았다.

강한 자가 보면 심심하겠지만, 약한 자에게는 그 심심함이 목숨줄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검끝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전에는 눈앞의 적을 향해 마구 나가고 싶었다. 지금은 먼저 자기 몸 한가운데에 곧은 선이 하나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 선을 벗어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나갔다가 바로 돌아오는 것. 그게 이 검식의 요체였다.

검이 춤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망가지지 않는 것.

서문진은 그제야 이 검법이 왜 외원용인지 알 것 같았다.

외원의 사람들은 대개 배움이 늦고, 몸은 피곤하고, 내력은 얕았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멋진 한 수가 아니라, 어설프게 죽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일이었다.

웃음거리가 되기에는 밤이 조용했다

문제는 강호든 외원이든, 남몰래 잘 익어 가는 것을 세상이 얌전히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날도 서문진은 초저녁 심부름을 마치고 무기걸이 뒤 빈터에서 목검을 들고 있었다. 달빛은 흐렸고, 바람은 건조했다. 그는 상막에서 하막으로, 하막에서 짧은 찌르기로 이어지는 세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이게 뭐냐?"

서문진이 돌아보니 흰 띠를 맨 외원 제자 셋이 서 있었다. 맨 앞은 전에 곡식 창고에서 그에게 발을 걸었던 자였다. 좁은 눈매에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 사내, 이름은 유천백이었다.

유천백은 서문진의 목검 끝을 툭툭 쳐 보더니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래서 네가 밤마다 기어 나오는 거였군. 폐품 더미에서 주운 검식 흉내나 내려고?"

뒤의 제자 둘이 낄낄댔다.

서문진은 목검을 내리지도, 치켜들지도 않고 가만히 섰다.

"구경은 끝났습니까?"

"끝나긴. 이제 시작이지."

유천백은 일부러 검집으로 서문진의 어깨를 밀쳤다.

"잡역이 검을 잡으면 웃긴 건 알겠는데, 저런 건 더 웃기다. 베는 건지, 마당 쓸 듯 휘젓는 건지 모르겠군."

"저도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배워서 뭐 하게?"

유천백이 피식 웃었다.

"낮엔 물지게, 밤엔 폐검식. 딱 네 분수에 맞긴 하다."

보통 같으면 서문진은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게 살아남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목검 손잡이가 이상하게도 뜨겁게 느껴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밤마다 몰래 익힌 것을 이렇게 대놓고 비웃는 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거슬렸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적을수록 작은 것 하나도 더 소중히 쥐게 된다.

서문진은 천천히 말했다.

"분수에 맞는다는 말은 좋군요."

"뭐가?"

"분수에 안 맞는 검법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뒤에 있던 제자 하나가 "이놈이?" 하고 앞으로 나오려 했지만, 유천백이 손으로 막았다.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말이 늘었네. 좋다. 그렇게 아까우면 한 번 보여 봐라."

그는 허리에서 목검을 뽑아 들었다.

"잡역 주제에 검을 쥐었으면, 적어도 한 번은 얻어맞아 봐야 검맛을 알지."

말은 장난 같았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목검이라도 잘못 맞으면 뼈가 금 가는 법이다.

서문진은 숨을 가라앉혔다.

도망칠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유천백이 굳이 그를 빈터로 끌지 않고, 무기걸이와 창고 벽 사이의 좁은 통로 쪽으로 한 걸음 옮기는 것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좁다.

둘이 나란히 서기도 거북한 통로였다. 한쪽에는 낡은 창대와 목검이 쌓여 있고, 다른 한쪽은 거친 석벽이었다. 크게 휘두를 자리가 없었다.

서문진은 책자 속 문장을 떠올렸다.

약한 자는 돌아오는 길에 죽는다.

그리고 또 하나.

먼저 빈틈을 닫아라.

그는 목검을 가슴 앞에 세우듯 들었다. 모양새는 볼품없었지만 중심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천백이 혀를 찼다.

"방어부터 하겠다는 거냐? 겁은 많군."

"원래 약한 놈이 오래 삽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넌 오늘 짧게 살겠다."

실전은 넓은 마당이 아니라 좁은 틈에서 벌어졌다

유천백의 첫 검은 빨랐다.

흰 띠를 찬 외원 무예제자답게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검이 위에서 사선으로 떨어져 들어왔다. 잡역을 겁주기에는 충분히 매서운 기세였다.

하지만 통로는 좁았다.

유천백의 검이 크게 돌며 들어오는 순간, 서문진은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반 보 옆으로 비끼며 검등으로 길만 살짝 틀어 놓았다. 책자에 적힌 대로였다. 막아 내는 것이 아니라 오고 싶은 길을 바꾸는 것.

딱.

목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났고, 유천백의 검 끝이 석벽을 긁었다.

유천백의 눈빛이 잠깐 달라졌다.

서문진은 놀랄 틈도 없이 목검을 거두어 제자리로 돌렸다. 이전 같았으면 이 한 번 받아낸 뒤에 자세가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검이 멀리 나가지 않았으니 돌아오는 길도 짧았다.

유천백이 곧장 둘째 수를 이었다. 이번엔 허리를 노린 횡베기였다.

서문진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손목만 낮춰 하막으로 걷어냈다. 다시 반 보. 그 짧은 반 보가 통로에서 몸 하나를 겨우 비켜 세웠다. 목검은 허공을 길게 갈랐지만 그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뒤에서 구경하던 제자 하나가 웃음을 멈췄다.

유천백은 그제야 진심이 섞인 얼굴이 되었다.

"재주를 숨기고 있었군."

"아닙니다."

서문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기기엔 너무 초라해서요."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자기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책자에 적힌 대로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첫걸음이었다.

유천백이 이를 악물고 파고들었다. 이번엔 빠른 연격이었다. 위, 옆, 다시 아래. 평소 마당이라면 보기 좋게 이어졌을 검세였지만, 좁은 통로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부딪힐 곳이 많았다.

서문진은 처음 두 번은 겨우 막았다. 팔이 저릿했고 손바닥이 얼얼했다. 세 번째에는 놓칠 뻔했다.

그 순간 그는 힘으로 버티려 하지 않았다.

물지게를 멜 때 방대두가 했던 말이 번개처럼 스쳤다.

무거운 걸 이기려고 하지 마라. 흔들리지 않게 따라가라.

서문진은 들어오는 검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비켜 따라갔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찰나, 힘이 가장 강한 머리 부분이 아니라 조금 죽는 지점을 건드리며 길을 흘렸다. 그러자 유천백의 목검이 통로 옆 무기걸이에 걸렸다.

순간이었다.

책자에서 수십 번 되풀이하던 그 재미없는 동작이 저절로 나갔다.

짧게 걷어내고, 곧게 찌른다.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박했다. 그러나 짧았기에 늦지 않았고, 곧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툭.

서문진의 목검 끝이 유천백의 목울대 앞에서 멈췄다.

아주 조금만 더 나갔으면 그대로 숨이 막혔을 자리였다.

통로가 고요해졌다.

유천백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뒤의 제자 둘도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이런 꼴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잡역이 흰 띠 제자를 꺾었다기보다, 흰 띠 제자가 스스로 좁은 통로와 짧은 검에 걸려든 모양새였으니까.

서문진 자신도 숨을 멈춘 채 서 있었다.

이긴 건가?

아니, 그런 말은 너무 컸다.

그저 한순간 먼저 닿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호에서 한순간 먼저 닿는다는 것은, 때로 전부이기도 하다.

유천백이 이를 악물고 목검을 쳐내려는 순간, 통로 입구에서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밤중에들 참 부지런하군."

엄 집사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등잔 하나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사람보다 그림자처럼 보였다.

유천백은 재빨리 목검을 내렸다.

"집사님, 이건 그저—"

"그저 장난이었겠지."

엄 집사의 시선이 통로를 쓸듯 훑었다. 마지막에 서문진 손의 목검과 유천백 목 앞에 닿았던 흔적 없는 거리에서 잠시 멈췄다.

"장난치기엔 자리가 나빴다. 통로는 넓지 않고, 목은 하나뿐이니까."

유천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 집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평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흰 띠 셋은 내일 새벽 창고 지붕 손질이다. 잡역 둘 몫까지."

뒤의 제자 둘이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진."

서문진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네 것도 장난이었나?"

서문진은 잠시 망설였다.

"아닙니다."

엄 집사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솔직하군. 좋다. 그럼 넌 내일 물지게 두 배다. 손이 남아돌면 밤에 쓸데없는 데 쓰게 되니."

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처분이었다.

하지만 엄 집사가 돌아서기 전, 아주 작게 덧붙인 한마디는 분명히 들렸다.

"방금 건 나쁘지 않았다. 살아남는 법으로는."

그 말 한 줄이 이상하게도 가슴에 오래 남았다.

쓸모없던 검초가 목숨값을 했다

하방으로 돌아오는 길, 방대두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들켰냐?"

"예."

"맞았냐?"

서문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거의 맞을 뻔했습니다."

방대두는 그 얼굴을 잠깐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표정은 맞은 놈 표정이 아닌데."

서문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인지, 흥분해서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하방에 들어가 모두 잠든 뒤에도 그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통로의 좁은 공간, 목검이 스치던 소리, 마지막에 목울대 앞에서 멈춘 자신의 검끝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그제야 분명히 알았다.

그 검식은 쓸모없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쓸모없는 상황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넓은 마당에서 멋을 겨루는 비무라면 분명 초라했을 것이다. 빠르고 화려한 검법들 사이에서 저 낡은 외원용 검식은 눈에 띄지도 못했으리라.

하지만 실전은 꼭 넓은 마당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벽이 있고, 문턱이 있고, 짐짝이 있고, 발을 헛디딜 흙과 돌이 있다. 놀라면 숨은 짧아지고, 무서우면 팔은 굳는다. 그런 자리에서 강한 자의 큰 검은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도 한다.

그 낡은 검식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었다.

짧게 움직이고.

빨리 돌아오고.

먼저 자기 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천재의 번뜩임 대신, 약한 자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검.

서문진은 어둠 속에서 손을 펴 보았다.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 있었고 손가락 마디는 욱신거렸다. 멋진 검객의 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으로, 자기 손이 아주 조금은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강해진다는 것이 꼭 하늘에서 번개를 끌어내리는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제보다 덜 흔들리고, 조금 더 늦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딱 한 치 먼저 닿는 것.

그 한 치가 쌓이면, 언젠가는 산도 넘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베개 밑에서 낡은 책자를 꺼내 다시 펼쳤다. 이제 책장 사이사이의 마른 종이 냄새조차 달리 느껴졌다. 남들이 버린 것이라도, 자기에게는 길이 될 수 있다. 그 단순한 사실이 어쩐지 뼈마디까지 뜨겁게 했다.

서문진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 천재가 아니면 어떤가."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말도 아니었다.

"깨닫기만 하면 되지."

그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등잔불은 이미 꺼졌고, 창틈으로 들어온 새벽빛이 종이 위를 희미하게 훑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하방 문밖에서 사각, 하고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이어 작은 등불 하나가 문틈 아래로 그림자를 흔들었다.

서문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시간에 하방 앞을 서성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잠시 뒤, 어린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또렷한 소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거기 있죠?"

서문진은 몸을 굳혔다.

그 목소리는 처음 듣는데도, 왠지 그냥 지나갈 인연 같지 않았다.

"아까 그 검."

문밖의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쓸모없다고 하던데, 나는 아닌 것 같았어요."

책 목록

도룡대의 새벽

전체 목차 보기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틸노트는 사용자가 AI를 활용해 노트를 쉽게 작성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AI 스퀘어 단톡방에 함께해요

AI 활용과 틸노트 사용 팁을 나누는 오픈채팅방입니다. 입장 비밀번호는 tilnote입니다.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