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학문 외원의 잡역제자

산문 안과 밖은 같은 하늘 아래가 아니었다
천학문으로 가는 길은 멀리서 보면 그럴듯했다.
산허리를 감아 오르는 돌계단은 곧게 뻗어 있었고, 봉우리 위로는 운무가 옅게 걸려 있었다. 해가 조금만 더 높이 뜨면 누가 봐도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가 보니, 신선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 사는 냄새였다.
짚단 냄새, 말똥 냄새, 젖은 장작 냄새, 갓 삶은 죽 냄새, 그리고 밤새 쌓인 피로가 햇빛에 데워질 때 나는 묘한 퀴퀴함까지.
산 아래 외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곡식 창고가 줄지어 서 있었고, 우물가에는 물동이를 든 하급 제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장정을 닮은 제자들이 땔나무를 패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회색 도포를 입은 이들이 약재를 널고 있었다. 멀리 담장 너머로 푸른 기와지붕이 보였는데, 윤서린은 그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저 안이 내원이다."
서문진은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진짜 고수들은 저기 있고, 저는 여기서 물 긷고 쓸고 닦는다는 말이군요."
"불만이 있나?"
"없을 리가 있습니까."
그는 손에 쥔 낡은 목패를 내려다보았다. '천학외원'이라 새겨진 글자는 반쯤 닳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숨값처럼 느껴졌던 물건이, 오늘은 자기 신분을 속이는 증표가 되어 있었다.
윤서린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잘 들어. 오늘부터 넌 눈에 띄면 안 된다."
"그건 자신 있습니다. 전 원래 눈에 안 띄는 쪽이 특기였어요."
"허풍은 넣어 두고. 묻는 말에는 짧게 답하고, 모르는 건 더 모르는 척해라. 너무 똑똑해 보여도 안 좋고, 너무 멍청해 보여도 오래 못 버틴다."
"적당히 하찮아 보이라는 뜻이군요."
"그래. 그건 네가 잘할 것 같더군."
서문진은 억울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외원 정문 쪽에서 누군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음!"
문 앞에는 책상 하나와 그 뒤에 앉은 사내 하나가 있었다. 사십은 넘었을 얼굴에 눈매가 매섭고, 콧잔등에는 오래된 칼자국이 희게 남아 있었다. 회색 비단 띠를 찬 것으로 보아 잡역제자 따위와는 급이 다른 인물임이 분명했다.
윤서린이 낮게 말했다.
"외원 집사다. 말수 줄여."
"저는 원래 말이 적—"
"지금도 많아."
둘이 책상 앞에 서자 사내가 목패를 툭 낚아챘다. 그는 한 번 뒤집어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건 또 어디서 주워 왔지?"
윤서린이 담담히 답했다.
"낙명곡 옛길에서 찾았습니다. 길 잃고 죽을 뻔한 아이인데, 외원 쪽 심부름을 하던 자들의 길표가 있기에 데려왔습니다."
집사는 서문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름."
"서문진입니다."
"성은 필요 없다."
집사가 붓을 들어 장부에 휘갈겼다.
"진. 열여덟?"
"열일곱인데요."
"오늘부터 열여덟이다."
"예?"
"외원 장부에 그렇게 적혔다."
서문진은 입을 다물었다. 강호의 문파쯤 되면 이름 하나쯤 중히 여길 줄 알았는데, 이곳은 사람 나이부터 대충 정하는 모양이었다.
집사는 목패를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말했다.
"신입 잡역은 서고 뒤 하방으로 보내라. 방대두가 맡는다."
윤서린이 아주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엄 집사."
엄 집사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내 이름을 아는군."
"외원에서 엄중한 일 처리는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다만, 입으로 하는 칭찬은 쌀 한 톨 값도 못 한다."
그는 서문진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저놈이 물동이 하나라도 깨 먹으면 네 칭찬값까지 얹어 두 배로 받아 내겠다."
윤서린은 대답 대신 서문진만 힐끗 보았다.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남긴 채,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서문진은 그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가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엄 집사가 책상을 탁 쳤다.
"멍하니 서 있지 마라, 진. 천학문은 한가한 놈 밥까지 먹여 주는 곳이 아니다."
서문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살아남는 일은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버티는 일이 남아 있었다.
잡역방에는 이름보다 손발이 먼저였다
서고 뒤 하방은 보기 좋게 낡아 있었다.
창호지는 누렇게 삭아 있었고, 문지방은 수많은 발에 닳아 가운데가 반들거렸다. 안에는 다닥다닥 붙은 평상 여섯 개와 벽에 걸린 누더기 같은 회색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신선문파의 제자 숙소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했고, 행상패 짐꾼들의 잠자리라고 하기엔 약간 더 답답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사람 하나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목은 통나무처럼 굵었다. 코끝은 눌려 있었고, 오른뺨에는 어릴 적 개한테 물린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른 생선 한 토막을 찢어 먹다가 서문진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새 거 왔네."
"저, 진이라고 합니다."
"난 방대두다. 여기선 다 나를 대두 형이라 부른다."
서문진은 그 머리통을 보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참 이름답다.
방대두는 생선을 삼키고 일어섰다. 서문진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듣자 하니 낙명곡 쪽에서 굴러 들어왔다던데, 운은 좋구나."
"운이 좋은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여기 들어왔으면 반은 운 좋고, 반은 운 나쁜 거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죽지는 않았으니까 운 좋고, 천학문 외원 잡역이 됐으니까 운 나쁘지."
방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구석에 앉아 짚신을 꿰매던 가느다란 소년 하나도 어깨를 들썩였다.
방대두는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건 팽구, 저건 오칠, 저기 코 훌쩍이는 놈은 만복. 다 너처럼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니 금방 친해질 거다."
"친해지는 기준이 좀 슬픈데요."
"좋은 기준은 내원에 가면 많다. 여긴 그런 거 없다."
방대두는 벽에 걸린 회색 옷 한 벌을 휙 던져 주었다.
"갈아입고 나와. 해 뜨기 전에 네 자리를 배워 둬야 한다."
서문진은 옷을 받아 들고 갈아입었다. 옷감은 거칠었고 소매는 약간 짧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입고 나니 사람 하나가 통째로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의 행상 견습도, 오늘 아침의 도망자도 사라지고, 그저 외원 어딘가에서 쓰다 버릴 수 있는 하급 제자 하나만 남는 기분이었다.
방대두는 그런 서문진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진짜 아무개 같군."
"칭찬이 맞습니까?"
"여기선 최고 칭찬이다."
하방 밖으로 나오자 방대두는 외원을 손바닥 뒤집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천학문은 위에서부터 장문인, 장로, 각당주, 내원 친전제자, 내원 정식제자, 외원 제자, 속가제자, 그리고 우리 같은 잡역으로 내려온다. 네가 잘못 부딪히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위로 끝이 없고, 너를 걷어찰 수 있는 사람도 위로 끝이 없다."
"희망적인 말이군요."
"희망은 밥이 안 된다."
그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했다.
"푸른 띠는 내원 정식제자, 흰 띠는 외원 무예제자, 검은 띠는 교관이나 집사급이다. 회색 민무늬는 우리다. 우리는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이고, 불려 가면 뛰어간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한 번 더."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이고, 불려 가면 뜁니다."
"좋다. 살아남을 만하겠군."
서문진은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낙명곡에서 배운 것은 쫓기는 법이었는데, 천학문 외원은 쫓기지 않으려면 먼저 숙이는 법부터 가르치고 있었다.
강호의 법칙이란 게 꼭 칼끝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검은 나중이고, 먼저 배우는 것은 물동이였다
천학문의 새벽은 종소리로 시작했다.
동이 틀 무렵, 산 위에서 둔중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러자 외원 전체가 마치 발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역제자들은 우물로 달려가고, 약방 사람들은 약솥에 불을 붙이고, 창고 쪽은 문짝을 열어젖혔다.
서문진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물지게를 어깨에 메다가 첫걸음부터 비틀거렸다.
"아악, 이게 왜 이렇게 무겁습니까?"
방대두가 코웃음을 쳤다.
"물동이는 다 무거워. 네가 약한 거지."
"행상 짐도 많이 져 봤습니다."
"그건 네 짐이고, 이건 남의 물이다. 남의 것이 대개 더 무겁지."
이상하게도 맞는 말이었다.
처음 두 번은 절반도 못 채워 쏟아 버렸고, 세 번째에는 아예 지게가 한쪽으로 쏠려 우물가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팽구가 배를 잡고 웃었고, 오칠은 지나가다 혀를 찼다.
"새것은 꼭 첫날 우물과 싸우더라."
서문진은 아픈 허리를 붙잡고 이를 갈았다. 낙명곡에서 살수를 속여도, 우물 앞에선 물동이 하나 못 이긴다는 사실이 몹시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방대두는 혼내지 않았다. 그는 물지게를 빼앗아 들더니 짧게 말했다.
"봐."
방대두는 동이를 꽉 채우지 않았다. 아홉 할쯤만 채운 뒤 양쪽 무게를 눈으로 재고, 발을 어깨너비보다 조금 좁게 벌렸다. 그리고 첫걸음을 디딜 때 허리를 쓰지 않고 무릎을 먼저 풀었다. 걸음은 생각보다 짧고 일정했다.
"무거운 걸 이기려고 하지 마라. 무거운 게 흔들리지 않게 따라가라."
서문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은 물동이에 관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낙명곡에서 윤서린이 해 준 이야기와 비슷하게 들렸다.
숨을 흩뜨리지 말 것.
발끝부터 내려놓을 것.
억지로 버티지 말고 흐름을 탈 것.
그는 다시 지게를 메고 방대두의 걸음을 흉내 냈다. 이번에는 조금 덜 흔들렸다. 여전히 어깨가 빠질 것 같았지만, 적어도 물이 전부 쏟아지지는 않았다.
방대두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아침 물 긷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장작 패기였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창고 쌀가마니를 옮겼고, 그것이 끝나면 식당 마루를 닦았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서문진의 팔과 허리는 이미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식당 뒤에 주저앉아 묽은 죽을 후루룩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천학문은 검을 가르치는 문파 아닙니까?"
옆에서 죽을 퍼먹던 만복이 말했다.
"가르치지."
"그런데 왜 난 하루 종일 나무만 팹니까?"
만복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검도 결국 나무에서 시작하니까."
"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나도 방금 했다."
서문진은 잠시 만복을 노려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힘들기는 죽을 만큼 힘든데,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은 꼭 웃을 틈도 한 줌쯤은 남겨 두었다.
문파의 기초는 무공보다 먼저 버릇이 되었다
점심 뒤, 잡역제자들은 잠시 마당 가장자리로 불려 나갔다.
그곳에는 외원 무예교관 하나가 서 있었다. 수염이 듬성하고 눈빛은 졸린데, 몸은 마른 대나무처럼 곧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신입과 잡역 몇을 훑어보더니 귀찮다는 듯 말했다.
"너희는 정식 수련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외원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넘어지거나 숨차서 쓰러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최소한의 기초는 익혀 둬라."
서문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체면은 당신들 것이고, 쓰러지는 건 우리인데요.
교관은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차갑게 말을 이었다.
"무공은 대단한 비결로 시작하지 않는다. 서는 법, 숨 쉬는 법, 힘을 흩뜨리지 않는 법으로 시작한다. 이 세 가지가 안 되면 검을 줘도 몽둥이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모두에게 마보를 서게 했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굽혀, 마치 보이지 않는 말을 타는 자세였다. 보기엔 간단했는데 막상 해 보니 허벅지가 순식간에 불탔다.
"등 세워."
"어깨 힘 빼."
"배꼽 아래로 숨을 떨어뜨려."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교관은 손가락으로 아랫배를 툭 치며 설명했다.
"사람이 숨을 놀라서 쉬면 가슴만 들썩인다. 그러면 금방 흐트러진다. 배 아래, 하단전이라 부르는 곳까지 숨이 내려간다고 생각해라. 쉽게 말해, 급할수록 배부터 단단히 묶으란 뜻이다."
서문진은 그 설명이 뜻밖에 이해되었다.
낙명곡에서 죽도록 뛰던 순간, 윤서린이 셋 들이쉬고 둘 내쉬라 했었다. 그때는 살기 급해 따라 했을 뿐인데, 이제 와 보니 그게 바로 기초였다.
강호의 비밀이란 건 번쩍이는 절기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숨 한 번 제대로 쉬는 데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마보는 한 식경도 안 되었는데 두 시진처럼 길게 느껴졌다. 팽구가 먼저 쓰러졌고, 만복은 이를 악물고 울먹였으며, 오칠은 다리가 떨려 이를 딱딱 부딪쳤다.
서문진도 세 번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낙명곡에서 돌과 물을 밟고 버티던 기억이 떠오르자 조금 더 설 수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이건 지금 당장 쓸 수 있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힘은 화려한 데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관은 끝내 자세를 풀게 한 뒤 짧게 말했다.
"기초는 재미없다. 그래서 다들 얕본다. 하지만 강한 자와 오래 가는 자는 대개 여기서 갈린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휙 돌아섰다.
서문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재미없다는 말은 참 정확하군."
방대두가 킥 웃었다.
"그래도 내일 또 한다."
"그 말은 더 재미없습니다."
외원의 현실은 칼보다 장부가 더 무서웠다
며칠이 지나자 서문진은 외원이 어떤 곳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강호에서 천학문이라 하면 사람들은 검객과 비무, 절벽 위 누각과 흰 구름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외원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장부였다. 어느 창고에 쌀이 몇 섬 들어왔는지, 약재가 얼마나 말랐는지, 말 여물이 모자라지 않는지, 어느 제자가 규율을 어겼는지, 누가 언제 다쳤는지까지 전부 적혔다.
그리고 그 장부를 쥔 사람이 바로 엄 집사였다.
엄 집사는 무공을 뽐내지 않았다. 칼도 거의 차지 않았다. 하지만 외원 사람들은 내원 제자보다 그를 더 무서워했다. 밥이 줄고, 잠자리가 바뀌고, 더 험한 일을 맡게 되는 것은 대개 검 때문이 아니라 장부 한 줄 때문이었다.
서문진은 사흘째 되던 날 그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곡식 창고에서 쌀가마니를 옮기던 중, 윗자리에 있던 외원 제자 하나가 일부러 발을 걸었다. 서문진은 휘청하며 가마니를 떨어뜨렸고, 입구에 놓인 쌀자루가 터져 흰 쌀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 제자는 흰 띠를 두르고 있었다. 외원에서 무예를 배우는 정식 제자였다. 나이는 스물쯤, 눈매는 잘게 찢어졌고 입가에는 늘 사람을 얕보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잡역이 손이 그 모양이니 쌀도 아깝군."
서문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방대두가 가르쳐 준 첫째 법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이고, 불려 가면 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엄 집사가 나타나 바닥의 쌀을 보고는 서문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흘렸나?"
"예."
"왜?"
서문진은 잠깐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발을 건 놈과 싸움이 붙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자기만 손해다.
그는 결국 가장 안전한 답을 골랐다.
"제가 서툴렀습니다."
엄 집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다. 오늘 저녁밥은 없다. 대신 흘린 만큼 주워라."
그 흰 띠 제자가 히죽 웃는 것이 보였다.
서문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무릎을 꿇고 쌀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돌바닥 틈에 박힌 낱알까지 손톱으로 긁어 모았다. 자존심은 상했으나, 신기하게도 손은 점점 빨라졌다.
그때 엄 집사가 지나가다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
"억울해도 티 내지 마라. 약한 자의 억울함은 대개 구경거리가 된다."
서문진은 고개를 들었다. 집사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날 밤, 방대두가 몰래 남겨 둔 차가운 만두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참은 건 잘했다."
서문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 잘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래도 살아남는 쪽을 고르면 대개 틀리진 않더라."
그 말은 윤서린도 했고, 낙명곡도 몸으로 가르쳐 준 말이었다.
강한 자가 되는 길은 멀었다.
그 사이에는 견디는 날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허드렛일 속에도 배울 것은 숨어 있었다
사람이 적응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닷새째 되자 서문진은 우물가에서 더는 엉덩방아를 찧지 않았고, 열흘째 되자 물지게가 어깨에 닿는 각도만으로도 오늘 허리가 괜찮을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장작을 패는 손도 제법 모양이 잡혔다. 무조건 힘으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결이 어디로 나 있는지 보고 도끼를 넣는 법도 배웠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 배우는 것은 전부 비슷했다.
장작은 결을 읽어야 쪼개졌고, 물동이는 무게를 읽어야 흔들리지 않았고, 사람은 기분을 읽어야 덜 얻어맞았다.
강호가 무서운 이유는 검 때문만이 아니라, 읽지 못하면 다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외원의 허드렛일이 묘하게 수련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쓸기는 발놀림을 바르게 만들었고, 물 긷기는 허리와 어깨를 다졌으며, 장작 패기는 손목 힘과 호흡을 맞추게 했다. 마보를 서는 시간은 늘 지루했지만, 그 뒤 물동이를 멜 때면 분명히 전보다 덜 흔들렸다.
서문진은 어느 날 우물에서 돌아오다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 사람 부려 먹는 척하면서 은근히 단련시키고 있군."
옆에서 듣던 만복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
"그럼 좋지 않나?"
"좋긴 한데, 속은 기분도 듭니다."
방대두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강호는 원래 좋은 일도 좀 속은 기분 들게 준다."
그 말에 셋이 함께 웃었다.
웃고 나서도 서문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그랬다.
낙명곡에서는 도망치며 숨 쉬는 법을 배웠고, 천학문 외원에서는 물동이를 지며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몸은 둘을 같은 것으로 기억하는 듯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진짜 수업이 시작되었다
외원의 하루는 길었다.
그러나 진짜 힘든 시간은 해가 진 뒤에 왔다. 낮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다들 널브러지고 싶었지만, 초저녁 종이 한 번 울리면 신입 잡역들은 다시 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이번엔 교관이 아니라 늙은 하급 사형 하나가 나왔다. 이름은 조한이라 했는데, 눈빛이 시큰둥하고 말수는 적었지만 자세 하나는 흠잡을 데 없이 단정했다.
그는 목검 몇 자루를 툭 던져 놓고 말했다.
"검법을 배우는 건 아니다. 검을 쥐는 버릇만 익힌다."
서문진은 목검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조한은 가장 먼저 손부터 고쳐 잡게 했다.
"꽉 쥐지 마. 죽일 듯 쥐면 손이 먼저 굳는다. 그렇다고 느슨하면 빠진다. 힘은 손끝이 아니라 팔과 허리에서 이어진다."
그리고는 가장 단순한 베기 하나만 반복시켰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제자리로. 딱 그것뿐이었다.
서문진은 처음엔 실망했다.
강호의 문파에 들어왔는데, 고작 이 한 동작이라니.
하지만 스무 번쯤 반복하고 나자 손목이 아팠고, 쉰 번쯤 지나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자세가 흐트러졌고, 백 번쯤 되었을 때는 왜 단순한 동작이 더 지겨운지 알게 되었다.
조한은 그런 그들을 무표정하게 보며 말했다.
"멋있는 초식은 누구나 좋아한다. 하지만 네 몸이 한 동작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멋있는 건 다 허세다."
서문진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천학문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옳은 소리를 재미없게 잘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팔을 주무르면서 그는 몰래 목검을 잡았던 감각을 떠올렸다. 발바닥이 땅을 누르고, 허리가 돌고, 손이 뒤늦게 따라오는 그 기묘한 순서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었는데, 묘하게 잊히지 않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싹은 자랐다
보름이 지날 즈음, 서문진은 외원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엄 집사는 더 이상 그를 새것 취급하지 않았고, 방대두는 욕 반 농담 반으로 일을 맡겼으며, 만복과 팽구는 식당에서 남는 반찬이 생기면 슬쩍 나눠 주었다. 가끔 흰 띠 제자들이 잡역들을 발로 차듯 부려 먹는 일도 있었지만, 이제 서문진은 언제 고개를 숙이고 언제 물러서야 덜 다치는지 조금 알았다.
그리고 그 틈틈이, 그는 남몰래 몸에 익는 것들을 챙겼다.
물동이를 멜 때는 호흡을 헤아렸고, 마당을 쓸 때는 발끝의 방향을 살폈고, 밤에는 하단전에 숨을 가라앉히는 연습을 했다. 남들이 보면 피곤해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은 전보다 훨씬 조용해지고 있었다.
화려한 변화는 없었다.
내력이 솟구치는 것도 아니고, 검기가 번쩍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숨이 예전보다 덜 흐트러졌고, 무거운 것을 들 때 허리가 먼저 무너지지 않았고, 화가 나도 곧장 입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 정도면 아직은 충분했다.
어차피 약한 자의 성장은 대개 남들이 못 알아볼 만큼 느리게 오는 법이었다.
그날 늦은 밤, 서문진은 창고 뒤 오래된 무기걸이를 정리하라는 심부름을 받았다. 녹슨 창대, 금 간 목검, 손잡이 풀린 연습검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먼지를 털다가, 구석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는 헤지고 귀퉁이는 물에 젖어 울어 있었다. 겉장에는 겨우 글자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기초… 검식… 외원용.'
서문진이 책자를 집어 들자, 옆에서 함께 정리하던 방대두가 힐끗 보고 웃었다.
"그건 버려도 된다."
"왜요?"
"너무 오래돼서 아무도 안 본다. 외원 꼬맹이들한테도 안 먹히는 검식이래."
"안 먹히는 검식?"
"느리고, 뻔하고, 볼품없다더군."
방대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마디로 쓸모없다는 거지."
서문진은 헤진 책자와 낡은 목검 하나를 번갈아 보았다.
쓸모없다.
그 말은 이상하게 귀에 오래 남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는 그 말을 자신에게도 꽤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서문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책자를 소매 속에 슬쩍 넣었다.
"버릴 거면, 제가 가져도 되겠군요."
방대두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땔감으로는 종이가 제일 빨리 타니까."
밖에서는 밤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치고 있었다. 내원 쪽 높은 누각에는 아직 등불이 켜져 있었고, 외원 하방에는 피곤에 지친 숨소리들이 하나둘 쌓여 가고 있었다.
서문진은 낡은 책자가 소매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걸었다.
천학문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그는 알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을 품었다.
강호에서 정말 쓸모없는 것이란, 어쩌면 남들이 너무 빨리 버려 버린 것들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약한 자는 대개, 그런 것들 속에서 살아남을 길을 찾게 된다고.
그날 밤 서문진은 여전히 이름 없는 잡역제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뿌리는 늘 땅속에서 먼저 자라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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