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명곡의 추격

골짜기는 사람을 가려서 삼키지 않았다
낙명곡의 입구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음침했다.
산 두 봉우리가 서로 이를 악물고 맞물린 틈 같았고, 그 사이로 스며 나오는 안개는 마치 골짜기 자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천천히 꿈틀거렸다. 바위는 밤새 비를 맞아 검게 젖어 있었고, 좁은 길 양옆으로는 키 큰 잡목과 덩굴이 뒤엉켜 사람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삼킬 듯 흔들리고 있었다.
서문진은 거의 굴러 떨어지다시피 비탈을 내려가며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뒤쪽 능선에서는 방금 전 들었던 휘파람이 다시 울렸다. 하나였다가 둘이 되고, 둘이었다가 셋이 되었다. 소리가 안개를 타고 여러 방향으로 번지자, 마치 온 산이 그들을 쫓는 것처럼 들렸다.
"저놈들, 숫자가 늘어난 것 같은데요."
앞서 달리던 윤서린이 대답했다.
"원래 추격하는 쪽은 많아 보이고, 쫓기는 쪽은 적어 보이지."
"지금은 진짜 적습니다."
"그건 맞아."
이 와중에도 그 말이 조금 웃겼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른쪽 바위에 퍽 소리가 나며 검은 비수가 하나 박혔기 때문이다. 조금만 옆으로 빗나갔어도 서문진의 귀를 꿰뚫었을 것이다.
서문진은 기겁하며 목을 움츠렸다.
"죽이려는 게 맞군요!"
"이제 알았나?"
윤서린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뛰되 함부로 뛰지 마. 발끝부터 내려놓고, 숨은 셋 들이쉬고 둘 내쉬어. 입으로만 헐떡이면 오래 못 간다."
"전 지금 오래 갈 생각보다 당장 안 죽는 게 중요—"
"같은 말이야."
서문진은 이를 악물었다. 억울했지만, 말은 맞았다. 그는 젖은 바위를 디디며 겨우 윤서린의 보폭을 흉내 냈다. 처음엔 발이 꼬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몇 번 호흡을 맞추자 정말로 숨이 조금 덜 흩어졌다.
그는 그 사실이 더 억울했다.
평생 바늘 꾸러미와 말린 떡을 메고 장터를 돌아다녔는데, 진작 누가 이렇게 숨 쉬는 법을 가르쳐 줬으면 적어도 사부 심부름에 덜 혼났을 텐데 싶었다.
바로 그때 윤서린이 손을 들었다.
"멈춰."
그 한마디에 서문진도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앞길은 겉보기에 평범한 흙길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흙 아래에 돌이 반듯하게 깔린 흔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흙과 이끼에 덮였지만, 누군가 인공적으로 닦아 놓은 길이었다.
윤서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길가를 살폈다.
"옛길이군."
"좋은 겁니까?"
"낙명곡에서 옛것은 대개 사람을 반기지 않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안개를 헤치고 흑의인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천으로 가렸고, 손에는 짧은 도와 쇠뇌가 들려 있었다.
윤서린의 검이 스르릉 빠져나왔다.
서문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기서 싸우면 끝장이었다. 윤서린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저 뒤에서 더 많은 놈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진은 어젯밤 객잔에서 보았던 부서진 탁자와 피 묻은 바닥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처음으로, 머리가 발보다 먼저 움직였다.
"저기 말고 옆으로!"
그는 윤서린의 소매를 확 잡아당기며 길 오른쪽의 바위 위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뒤따르던 흑의인 하나가 옛길 한복판을 밟았다.
딸깍.
작고 마른 소리였다.
다음 순간, 길 양옆 바위틈에서 녹슨 쇠살이 우수수 쏟아졌다.
"컥!"
"함정이다!"
한 놈이 어깨에, 다른 한 놈이 허벅지에 쇠살을 맞고 비틀거렸다. 비명은 짧았고, 공포는 길었다. 안개 속에서 더 뒤따라오던 그림자들이 급히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진은 바위 뒤에 엎드린 채 숨을 삼켰다.
윤서린이 그를 한번 힐끗 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서문진은 침을 삼켰다.
"장터 창고 바닥이랑 비슷해서요. 너무 오래된 판자는 가운데가 유난히 반듯하거든요. 사람이 자꾸 밟아서."
"넌 물건만 보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목숨값도 좀 보는 중입니다."
윤서린의 입가가 아주 잠깐 풀렸다.
"좋아. 계속 봐."
그 말은 이상하게도 힘이 됐다.
발자국을 버리는 법
둘은 함정길을 돌아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낙명곡 안쪽은 생각보다 더 험했다. 넝쿨이 발목을 잡아당기고, 젖은 낙엽이 바위를 덮어 한 걸음마다 미끄러웠다. 길이라고 부를 만한 길도 이내 사라졌다.
서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지나온 비탈에는 발자국이 선명했다. 진흙이 많아 숨을 곳은 많았지만, 그만큼 흔적도 잘 남았다.
"큰일 났는데요."
"뭐가?"
"저 자국이요."
윤서린도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눈에도 자기들이 남긴 흔적이 보였을 것이다. 검은 흙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었다. 추적에 익숙한 자라면 눈 감고도 따라올 만했다.
"지워야겠군."
"지울 걸 알면 진작 지웠겠죠."
윤서린이 앞을 가리켰다.
"그래서 배우라는 거다. 흙을 밟지 말고 돌과 뿌리만 타."
말은 쉬웠다.
실제로 해 보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람 놀리는 재주에 가까웠다. 윤서린은 빗물에 젖은 바위와 나무뿌리만 골라 밟으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반면 서문진은 두 걸음에 한 번씩 흙을 밟고, 세 걸음에 한 번씩 휘청거렸다.
"이건 무공이잖아요!"
"아니. 습관이다."
"그 습관을 왜 하필 지금—"
그는 투덜거리다 문득 왼쪽 아래를 보았다. 바위 사이로 가느다란 계류가 흐르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물살은 차고 빨랐지만, 발목 정도 깊이라 완전히 못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서문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물길로 가죠."
윤서린이 고개를 돌렸다.
"차다."
"추격자들은 더 차갑게 느낄 겁니다. 발자국이 끊기잖아요."
그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장터에서 물건 떼먹고 도망간 놈 찾을 때도, 개울 하나만 건너면 한참 헤맵니다. 사람도 짐승도 냄새가 흩어지니까요."
윤서린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먼저 들어가."
"왜 제가 먼저입니까?"
"네 생각이니까."
그건 이상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서문진은 입술을 깨물고 계류 속으로 발을 들였다.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칼날을 갈아 만든 물에 발을 담근 느낌이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사람 잡—"
"살리려고 들어온 거다."
윤서린도 뒤따라 물에 들어섰다. 둘은 바위 그림자를 따라 계류 안쪽으로 몸을 숨긴 채 움직였다. 물소리가 발소리를 삼켜 주었다. 흔적도 흐려졌다.
서문진은 물살 속에서 휘청거리다 품속을 더듬었다. 아직 남아 있던 작은 약재 꾸러미가 손끝에 닿았다. 후추와 비슷한 매운 향이 나는 산초 가루였다. 원래는 음식 잡내를 없애거나 벌레 쫓는 데 쓰는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조금 꺼내 뒤쪽 물길에 털어 넣었다.
윤서린이 물었다.
"그건 또 뭔가?"
"냄새 섞는 겁니다. 저놈들 중에 코 좋은 놈이 있으면 좀 덜 좋으라고요."
윤서린은 잠시 그를 보더니 낮게 말했다.
"넌 정말 행상패에서 자란 게 맞군."
"칭찬이죠?"
"지금은 그래."
그 한마디에 서문진은 조금 살 것 같았다.
귀로 듣는 길, 눈으로 밟는 함정
계류는 한참 뒤에 갈라졌다. 하나는 골짜기 안쪽 어두운 틈으로 굽이쳤고, 다른 하나는 얕은 폭포를 만들며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서문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윤서린은 무릎을 굽혀 젖은 돌바닥을 살폈다.
"아래로는 물소리가 너무 커. 숨기엔 좋지만, 매복당하면 답이 없다."
"그럼 위쪽이요?"
"위쪽은 좁다. 좁다는 건 적이 적게 와도 막힌다는 뜻이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정말로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람이 돌을 밟을 때 나는 미세한 미끄럼 소리. 이어서 검집이 바위에 닿는 마른 마찰음.
서문진은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위에도 있어요."
윤서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포위하려는군."
뒤에서도 소리가 있었다. 휘파람 한 번, 짧은 대답 두 번. 이젠 정말로 앞뒤가 막힌 셈이었다.
서문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럴 땐 보통 어떻게 합니까?"
"강한 자는 뚫고 나간다."
"약한 자는요?"
윤서린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속인다."
그 말은 아주 간단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세상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문진은 숨을 죽였다. 시장통에서 값 깎기 싫은 손님을 다른 물건 쪽으로 돌리는 일, 사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덜 팔린 떡을 잘 팔린 것처럼 보이게 늘어놓는 일, 이런 잔머리는 익숙했다. 하지만 사람을 속여 목숨을 건지는 일은 전혀 달랐다.
그래도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실 꾸러미 하나, 작은 바늘통, 비에 젖은 천 조각, 염료가 든 종이봉지 두 개가 손에 잡혔다. 남색과 황토색이었다. 장터에서 천 물들이는 값싼 염료였다.
"시간 좀 벌 수 있게 해 볼까요?"
윤서린은 묻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서문진은 남색 염료 봉지를 뜯어 아래로 떨어지는 물길에 털었다. 빗물에 젖은 색가루는 곧 푸르게 번지며 물빛을 어둡게 물들였다. 이어 그는 천 조각 하나를 윤서린의 상처에서 새어 나온 핏물에 살짝 적신 뒤, 일부러 아래쪽 길목 바위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바늘통에 든 쇠바늘 몇 개를 모아 맞은편 비탈로 힘껏 던졌다.
짤그랑, 짤그랑.
작은 쇳소리가 안개 속에서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곧바로 아래쪽에서 외침이 터졌다.
"저쪽이다!"
"피 흔적이 있다!"
"폭포 아래를 막아!"
서문진은 심장이 세게 뛰는 걸 느꼈다. 들켰을까 싶었지만, 발소리는 아래쪽으로 몰렸다. 윤서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꿈치를 잡아 위쪽의 좁은 바위틈으로 이끌었다.
둘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몸을 밀어 넣었다. 바위가 등에 닿고, 축축한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바로 아래를 지나갔다. 흑의인 셋이 안개를 헤치며 물든 물길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틈새로 보였다.
한 놈이 멈춰 서더니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피는 아니다."
서문진의 심장이 다시 철렁했다.
그러나 다른 놈이 급히 말했다.
"색이 흐려진 것뿐이다. 빨리 가!"
그 순간 서문진은 깨달았다. 추격하는 자들도 완벽하지 않았다. 급하면 틀리고, 서두르면 속는다.
그건 이상하게 용기를 줬다.
흑의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윤서린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잘했다."
서문진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요?"
"네 덕에 한참 아래로 빠졌다."
"이상하네요. 사부는 제가 뭘 하면 대개 한숨부터 쉬었는데."
"그분은 보는 눈이 까다로운가 보지."
"아닙니다. 그냥 저를 별로 안 좋아하셨을 겁니다."
윤서린은 대답 대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도망치는 자에게도 용기는 필요했다
바위틈을 빠져나온 뒤부터 길은 더 험해졌다.
낙명곡의 안쪽은 단순한 산길이 아니었다. 옛날 누군가 손댄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반쯤 묻힌 돌계단, 썩어 문드러진 말뚝, 바위 벽에 파인 작은 홈들. 하지만 관리된 지 오래되어 이제는 길이라기보다 잊힌 상처처럼 보였다.
그 상처를 따라 도망치는 동안, 윤서린의 움직임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이 서문진의 눈에도 보였다. 객잔에서 입은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회색 장삼 옆구리 쪽이 젖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이진 않겠지."
"전 진지합니다."
"나도 진지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하나를 짚고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안색도 전보다 창백했다.
서문진은 겁이 났다. 윤서린마저 쓰러지면 자신은 여기서 끝이었다. 무공도 없고, 칼도 제대로 못 쓰고, 낙명곡이란 이름 외에는 아는 것도 없는 소년이 혼자 살아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얼른 배낭을 내려놓고 안을 뒤졌다. 약재 몇 가지와 천 조각, 바늘, 실이 나왔다.
"잠깐 앉아 보세요."
"시간 없다."
"피를 이렇게 흘리는데 시간 타령할 때입니까?"
윤서린이 그를 본다. 서문진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러나면 두 사람 다 죽는다는 건 그도 알았다.
결국 윤서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서문진은 손을 씻을 틈도 없이 빗물에 천을 적셔 상처 부위를 눌렀다. 윤서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약재 가루를 조금 뿌리고 천으로 단단히 감아 묶자, 그녀가 말했다.
"솜씨가 아주 형편없진 않군."
"행상패에 있으면 바늘질이 밥줄입니다."
"사람 꿰매는 일도?"
"그건 오늘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불평 마세요."
상황은 급한데, 그 말에 윤서린이 짧게 웃었다. 숨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왼편 숲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한 놈이 안개를 찢고 튀어나왔다. 얼굴을 가린 흑의인, 오른뺨의 긴 칼자국, 그리고 붕대로 감긴 손. 장터 찻집에서 고춧가루를 뒤집어썼던 바로 그 사내였다.
"또 너냐."
그 사내의 눈에 이글거리는 독기가 서렸다.
"이번엔 눈이 아니라 목을 베어 주마."
윤서린이 검을 뽑으려 했지만, 상처 탓에 반 박자 늦었다. 그 짧은 틈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서문진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도망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본능적으로, 그는 옆에 떨어진 젖은 자갈무더기를 두 손으로 밀어냈다. 비탈 끝에 쌓여 있던 자갈과 흙덩이가 우르르 쏟아지며 흑의인의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사내의 자세가 흔들렸다.
"이 새끼가!"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윤서린의 검이 번개처럼 뻗어 사내의 도를 비켜 쳐냈다. 쇳소리가 울렸고, 사내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다시 달려들며 왼손에서 암기를 꺼냈다.
서문진은 뒤로 물러나려다 품속의 옥패를 느꼈다.
목숨보다 무겁다.
어젯밤 청의 노인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다리가 떨리면서도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허리춤에 달아 두었던 실꾸러미를 풀어 사내 쪽으로 내던졌다. 길게 풀린 실이 젖은 덩굴에 걸리며 사내의 발목을 스쳤고, 그 찰나에 윤서린의 검집 끝이 사내의 명치를 세게 쳤다.
"크헉!"
사내가 숨을 삼키며 한 걸음 비틀거렸다.
윤서린은 더 쫓지 않았다. 대신 서문진의 어깨를 밀쳤다.
"지금이다. 달려!"
둘은 곧바로 반대편 좁은 길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욕설이 들렸지만, 사내도 바로 따라붙지는 못했다. 아마 숨이 막혔을 것이다.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서문진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방금… 저, 저 그놈한테 덤빈 겁니까?"
"덤빈 건 아니고, 살려고 발악한 거지."
"그게 같은 말 아닙니까?"
윤서린이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아니다. 덤비는 건 이기려고 하는 거고, 발악은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다. 약한 자는 그 차이를 알아야 해."
서문진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용기라는 게 칼 들고 웃으며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무서워서 손이 떨려도, 도망칠 힘을 벌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도 용기였다.
낙명곡은 강한 자보다 서두르는 자를 먼저 죽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안개는 더 짙어졌다.
낙명곡 안쪽 깊은 곳에는 작은 폭포 하나가 숨어 있었다. 높지는 않았지만 절벽 틈을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 덕분에 바위 주변은 늘 물안개로 젖어 있었다. 폭포 뒤편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도 보였다.
윤서린은 그 안쪽을 살폈다.
"잠깐 숨기엔 좋다."
둘은 폭포 뒤 그늘로 몸을 숨겼다. 물소리가 워낙 커서 바깥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서문진은 차가운 바위에 기대앉아 겨우 숨을 골랐다. 온몸이 젖고 흙투성이였다. 다리는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후들거렸다.
"이제 좀 살겠—"
그때였다.
폭포 바깥에서 다시 휘파람이 들렸다. 이번에는 바로 가까운 곳이었다. 추격자들이 길을 다시 찾아낸 것이다.
서문진의 표정이 굳었다.
"저놈들 진짜 질기네요."
"살수는 원래 그렇지."
"저는 원래 떡 장수 비슷한 건데 왜 이런 사람들한테 쫓기고 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윤서린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발소리.
하나, 둘, 셋… 적어도 넷이었다.
폭포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던 흑의인들 중 하나가 멈춰 섰다.
"여기 물소리가 너무 크다. 안쪽도 보자."
서문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폭포 뒤 틈은 겉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끝이었다.
윤서린이 조용히 검자루를 쥐었다. 상처가 있는 몸으로 넷을 상대하면 결과는 뻔했다.
서문진은 사방을 급히 둘러봤다. 폭포 뒤의 바위벽, 오래된 금, 바닥에 쌓인 돌, 그리고 오른쪽 구석으로 이어지는 아주 좁은 틈. 물에 씻겨 드러난 바닥에는 사람 발자국과는 다른, 오래된 홈이 일정하게 나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자연스러운 마멸이 아니었다. 뭔가 밀려 열리던 흔적 같았다.
"저기."
그는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윤서린도 그쪽을 봤다. 그러나 확인할 틈이 없었다. 이미 흑의인 하나가 폭포 안쪽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서문진은 주머니에서 남은 황토색 염료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일 새도 없이, 그것을 폭포 뒤 얕은 물웅덩이에 전부 털어 넣었다.
노란 가루가 물에 퍼지며 흙탕처럼 번졌다. 동시에 그는 발로 바닥의 돌 하나를 세게 걷어찼다.
돌은 폭포 안쪽 벽에 부딪혀 큰 소리를 냈고, 흙탕물이 튀며 시야를 흐렸다.
"안쪽에 있다!"
흑의인 둘이 급히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앞장서던 놈이 흙탕물 아래 숨겨진 돌판을 힘껏 밟았다.
쿵.
낮고 묵직한 진동이 바위벽 안쪽에서 울렸다.
이어서 폭포 오른편 절벽 위에서 오래 묶여 있던 고목 하나가 뿌리째 기울며 떨어져 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흙과 돌덩이가 우르르 쏟아지고, 비탈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피해라!"
비명과 함께 흑의인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서 피할 데는 많지 않았다. 둘은 돌무더기에 휩쓸렸고, 다른 하나는 물살에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서문진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윤서린이 그를 낚아채며 외쳤다.
"지금!"
둘은 흔들리는 바위 사이를 비집고 아까 본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에서는 아직도 무너지는 소리와 욕설이 이어졌다. 낙명곡은 그 누구 편도 아니었지만, 서두르는 자를 먼저 삼키는 것만은 확실했다.
폭포 뒤의 옛길
좁은 틈은 생각보다 길었다.
처음에는 몸을 옆으로 돌려야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폭이 조금씩 넓어졌다. 끝내는 사람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석굴이 나왔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바닥은 오래전 사람 손이 닿았던 것처럼 비교적 평평했다.
서문진은 벽을 더듬다 문득 손끝이 글자에 닿는 걸 느꼈다.
"이거… 새김이 있습니다."
윤서린이 검집 끝으로 이끼를 걷어 냈다.
바위벽에 흐릿한 문양 하나가 드러났다.
구름을 가르는 한 자루 검.
반쪽 옥패에 새겨져 있던 것과 닮은, 그러나 더 오래되고 더 거친 문양이었다.
서문진은 숨을 죽였다.
"천학문…"
윤서린도 낮게 말했다.
"옛 통로였군."
석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썩어 가는 나무궤짝 하나와 무너진 석등, 그리고 벽에 기대 쓰러진 돌비가 보였다. 비문은 반쯤 닳아 읽기 어려웠지만, 아래쪽에 '외원' 두 글자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서문진이 눈을 깜빡였다.
"외원?"
"천학문 본산으로 바로 드는 길이 아니라, 바깥 살림과 인원을 드나들게 하던 길이었을 거다."
윤서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곡 밖으로 나와 천학문 외원 쪽으로 이어지겠지."
"그럼…"
서문진은 아직도 숨이 차는 가슴을 누르며 물었다.
"우리가 도망쳐 온 게 우연은 아니란 뜻입니까?"
윤서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품속의 반쪽 옥패를 한번 눌러 보며 말했다.
"강호에서 우연은 대개, 누군가가 이름을 붙이지 못한 필연이지."
"그 말은 하나도 안 위로가 됩니다."
"원래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석굴 끝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낮은 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이 몸을 숙여 빠져나가자, 어느새 해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밖은 낙명곡 반대편의 완만한 산비탈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아까의 음습한 협곡보다는 훨씬 숨 쉬기 편했다.
멀리 아래쪽으로는 논과 밭, 연기 오르는 초가 몇 채, 그리고 더 멀리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는 넓은 길이 보였다. 그 길 위로는 짐을 실은 수레와 푸른 회색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오가고 있었다.
윤서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길이군."
"뭐가요?"
"천학문 외원으로 물자를 들이는 길."
서문진은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추격자들에게 잡혀 죽지 않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갑자기 천학문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옥패에 새겨진 바로 그 이름의 문파가.
이쯤 되면 세상이 자기를 너무 열심히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털썩 주저앉고 싶은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물었다.
"설마 저길 갑니까?"
"그래."
"지금 우리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천학문과 얽혔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래."
"그런데 저길 간다고요?"
"그래서 가는 거다."
서문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 정말 당신이 가끔 제정신인지 의심됩니다."
윤서린은 태연했다.
"강호에서 가장 잘 숨는 곳은 대개 적이 네가 감히 못 들어갈 거라 여기는 곳이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더 싫군요."
그녀는 석굴 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더니, 썩은 나무궤짝 밑에서 낡은 목패 하나를 꺼냈다. 오래되어 반쯤 썩었지만, 표면에는 분명히 '천학외원'이라 새겨져 있었다.
서문진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디에 씁니까?"
윤서린이 목패를 손바닥에서 한 번 뒤집었다.
"쓰는 법은 많지."
"가령요?"
"문을 열거나, 사람을 속이거나."
그녀는 시선을 들어 서문진을 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행상 견습이던 소년, 지금은 흙과 피와 안개를 뒤집어쓴 채 겨우 서 있는 소년을.
"오늘 넌 도망치는 법을 조금 배웠다."
서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발자국 버리는 법, 숨 아끼는 법, 사람 속이는 법이요."
"그리고 겁이 나도 발을 떼는 법."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서문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윤서린은 손에 든 목패를 그에게 던졌다. 서문진은 허둥지둥 받았다.
"살 길이 하나 있다."
"듣기 무섭네요."
"무서워도 들어."
그녀는 한 글자씩 또렷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넌 천학문 외원의 잡역제자다."
서문진은 목패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예?"
"예가 아니라 그렇다는 거다."
"저는 검도 못 잡고, 문파 예법도 모르고, 밥 푸는 건 좀 하지만 그것도 사부한테 늘 욕먹—"
"딱 좋군."
"뭐가 딱 좋습니까?"
"잡역제자는 원래 별걸 다 한다."
서문진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낙명곡에서 죽을 뻔했는데, 살아남고 나니 이번에는 문파에 숨어들어 잡역이나 하라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묘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게 정말로, 지금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걸.
멀리서 저녁 종 같은 둔한 소리가 산허리를 타고 울려왔다. 천학문 쪽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문진은 젖은 손으로 목패를 꽉 쥐었다. 반쪽 옥패는 품속에서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고, 낙명곡에서 배운 두려움은 아직 다리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 한가운데에, 아주 작고 질긴 무언가도 함께 남아 있었다.
살아남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날 낙명곡에서 서문진은 처음으로 알았다.
강호에서 약한 자가 버티는 법은, 강해질 때까지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검보다 허드렛일이 더 쓸모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습니다."
윤서린이 눈썹을 들었다.
"뭐가?"
"해 보죠. 잡역제자."
그는 툴툴거리듯 덧붙였다.
"대신 살아남고 나면, 꼭 국수 한 그릇 사 주십시오."
윤서린은 처음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살아남으면 두 그릇 사 주지."
두 사람은 석굴 입구를 떠나 천천히 산비탈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의 낙명곡은 안개 속에서 검은 입을 다문 채 잠잠해 보였다. 하지만 서문진은 알고 있었다. 그 골짜기는 오늘 자신에게 그냥 공포만 준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법, 숨는 법, 그리고 약한 자도 머리와 배짱으로 하루를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남겼다.
해는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천학문으로 가는 길 위에는 이미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