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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객잔

빗길 끝의 등불

비는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들판의 먼지를 얌전히 눌러 주는 봄비 같더니,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부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진흙길은 사람 발목을 붙잡는 죽이 되었고, 처마 끝에서는 빗줄기가 끊이지 않는 구슬처럼 떨어졌다.

서문진은 젖은 짚삿갓을 벗어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손바닥에는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가 흥건했다. 나이 열여섯, 키는 또래보다 약간 크지만 몸은 아직 덜 여문 소년이었다. 장사꾼이라고 하기엔 어깨가 좁고, 서생이라고 하기엔 손등의 굳은살이 너무 거칠었다. 그는 약재 꾸러미와 바늘, 실, 말린 떡, 염료 따위를 팔고 다니는 행상패의 견습이었다.

쉽게 말해, 이것저것 짊어지고 사부에게 혼나며 세상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놈아,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문부터 열어라!"

뒤에서 호통이 날아왔다. 행상패 우두머리인 장노삼이었다. 사십이 훌쩍 넘은 사내였는데, 늘 인상을 쓰고 다녀서 마흔인지 예순인지 알기 어려웠다. 좋은 점이 있다면, 욕을 하면서도 굶기지는 않는다는 것 하나였다.

서문진은 얼른 앞을 보았다. 빗안개 너머로 객잔 하나가 보였다. 낡은 현판에는 '우화객잔'이라 적혀 있었으나, 먹이 반쯤 벗겨져 '우…객…'처럼 보였다. 두 층짜리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이런 날씨엔 궁전보다 반가운 곳이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붉은 등롱 두 개가 빗속에서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살았다."

서문진이 중얼거리자 장노삼이 코웃음을 쳤다.

"아직 안 죽었다. 숙박비 깎기 전까진 살아난 게 아니다."

그 말에 서문진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도 장노삼의 인색한 소리는 비바람 속에서도 사람을 안심시켰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이 사부는 닭 한 마리 값 때문에라도 내일을 살아낼 사람이었다.

그는 짐을 고쳐 메고 객잔 문을 밀었다.

문 안에서는 뜨끈한 김과 술 냄새, 삶은 고기 냄새가 한꺼번에 들이쳤다. 바깥이 물속이라면 안은 불 속 같았다. 젖은 망토를 털어 대는 표국 무사 둘, 구석에서 주판을 두드리는 비단상인, 팔짱을 낀 채 낮잠을 자는 덩치 큰 나그네, 그리고 객잔 주인 부부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세상은 비가 와도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돈을 세었다.

서문진은 그 사실이 좋았다.

강호니 영웅이니 하는 건 남의 얘기였다. 그의 세상은 '오늘 떡을 몇 장 팔았는가', '사부에게 몇 대를 맞을 것인가', '저녁으로 면을 먹을 수 있을까'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적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그럴 줄 알았다.

낡은 검과 이상한 손님들

장노삼은 능숙하게 주인과 값을 흥정해 싼 방 하나와 마굿간 옆 창고 자리를 얻어 냈다. 그는 젖은 짐을 내리자마자 서문진에게 일을 시켰다.

"노새부터 보고 와라. 그리고 부엌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 와. 허튼짓 말고."

"제가 언제 허튼짓을 했다고요?"

"태어난 것부터가 허튼짓이지."

서문진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이런 말다툼은 둘 사이의 인사 같은 것이었다.

그는 뒷마당과 부엌을 오가며 젖은 밧줄을 정리하고, 노새의 등을 닦고,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날랐다.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도 객잔 안의 손님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에 앉은 청의 노인이었다. 허리는 꼿꼿했고, 앞상에는 따뜻한 차 한 잔뿐이었다. 검은 탁자 옆에 기대어 있었는데, 검집은 낡았으나 손잡이는 자주 쥔 사람의 그것처럼 반질반질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나그네는 아니었다.

둘째는 계단 아래 어두운 자리에 앉은 흑의 사내 셋이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데다 말수가 적어 더 수상했다. 그들은 술은 시켰지만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대신 문과 창, 계단을 번갈아 살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냥개들 같았다.

셋째는 이층 난간 가까운 자리의 젊은 여인이었다. 연한 회색 장삼에 여행용 망토를 걸쳤는데, 옷은 수수해도 자태는 감출 수 없었다. 얼굴 절반은 빗장막 같은 늘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졌지만, 손이 무척 고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손등에 작은 상처가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바느질하는 손이 아니라 칼자루를 잡는 손처럼 보였다.

서문진은 뜨거운 물을 들고 가다가 그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맑고 차가웠다. 빗물에 씻긴 칼끝처럼.

서문진은 괜히 뜨거운 주전자를 더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 손이 데일 뻔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객잔 하녀가 킥 웃었다.

"시골 총각이네."

"누가요?"

"방금 얼굴 빨개진 사람."

서문진은 대꾸하지 않고 서둘러 지나갔다. 귀까지 화끈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시뿐이었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는 순간, 청의 노인이 아주 작게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소년."

"예?"

노인은 서문진이 아닌, 아무 데도 보지 않는 듯한 눈으로 창밖 빗줄기를 바라본 채 말했다.

"오늘은 일찍 자거라. 밤이 길다."

서문진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였다.

"비가 오면 손님이 많은 법이니까요?"

그 말에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래. 손님이 많지."

그 대답은 이상하게도 등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피 냄새는 술 냄새보다 늦게 온다

해가 졌다.

비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고, 객잔 안은 저녁 손님들로 더 북적였다. 장노삼은 술 반 병만 마시겠다더니 벌써 반 병을 세 번이나 비웠고, 표국 무사 둘은 누가 먼저 말에서 떨어졌느니 하며 고함을 질러 댔다. 부엌에서는 칼 도마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고, 장작 타는 냄새가 구수하게 번졌다.

서문진은 구석에서 늦은 저녁으로 양고기 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였다.

쨍—

금속이 부딪히는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객잔 안을 가르며 울렸다.

누군가 젓가락을 떨어뜨린 소리가 아니었다.

검이었다.

소리의 근원은 창가의 청의 노인이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의 손에는 검이 뽑혀 있었다. 얇고 긴 칼날 끝이 등잔불을 받아 한 번 번쩍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계단 아래의 흑의 사내 셋이 벌떡 일어났다.

"움직이지 마라!"

외침이 터지자 객잔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술잔이 엎어지고, 아이 울음소리가 나고, 누군가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 앞에는 이미 또 다른 흑의 사내 둘이 막아 서 있었다. 그들이 언제 들어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무림맹의 개도 여기까지 오나."

청의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무림맹.

서문진은 그 말을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강호의 대문파들이 힘을 합쳤다는, 장터의 술꾼들이 혀를 차며 떠들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건 늘 멀리 있는 이야기였다. 비단상단이나 소금값처럼 자기 삶과는 상관없는 것.

그런데 지금 그 이름이 바로 눈앞에서 칼과 함께 튀어나왔다.

"노인장, 순순히 물건을 내놓으면 살려 드리지."

흑의 사내 중 하나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를 살려 두겠다고?"

노인이 한숨처럼 말했다.

"거짓말도 수련이 필요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움직였다.

서문진은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노인이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인데 사람이 사라진 것 같았다. 검광이 비처럼 흩어지고, 탁자 하나가 반 토막 나며 술과 국물이 허공으로 튀었다. 흑의 사내 둘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고, 하나는 소매가 찢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가슴팍에서 피가 번졌다.

하지만 상대도 범상치 않았다. 문 앞의 둘이 쇠사슬 끝에 달린 갈고리를 휘둘렀고, 계단 난간에서는 언제 내려왔는지 그 회색 장삼의 여인까지 검을 뽑아 들었다.

서문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분도…?"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흑의 사내 하나의 목을 겨누던 갈고리를 검등으로 밀어 내더니, 손목을 틀어 상대의 팔꿈치를 꺾었다. 동작이 매끄러워 마치 춤처럼 보였지만, 비명 소리는 춤과 거리가 멀었다.

객잔 주인이 탁자 밑으로 숨으며 울부짖었다.

"내, 내 그릇들!"

아내가 등짝을 후려쳤다.

"목숨부터 챙겨요!"

그 와중에 장노삼은 벌벌 떨면서도 서문진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이리 와! 바닥에 엎드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칼날 하나가,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튕겨 나간 비수가 빗맞으며 서문진 쪽으로 날아왔다. 장노삼이 그를 밀쳐 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에 박혔을 것이다. 비수는 뒤의 기둥에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서문진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국수가 쏟아져 얼굴에 기름이 묻었다.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귀에서는 쇳소리와 비명, 탁자 깨지는 소리만 웅웅 울렸다.

세상은 한순간에 너무 빨라졌다.

그는 일어나려다 멈췄다.

탁자 밑, 바로 자신의 앞에 무언가가 굴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그만 물건이었다. 피 묻은 천 조각에 반쯤 싸인, 손바닥만 한 옥패.

녹색도 흰색도 아닌 묘한 빛을 띠는 옥이었다. 번개가 치는 순간, 그 표면에 새겨진 무늬가 언뜻 드러났다.

구름 사이를 가르는 한 자루 검.

그리고 그 밑에 아주 작은 글자 두 자.

서문진은 읽을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 탁자를 발로 차 버리며 나무판자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옥패를 움켜쥐고 몸을 굴렸다.

"소년! 그걸—"

누군가 외쳤다.

청의 노인이었는지, 여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곧바로 등잔이 깨졌다.

불이 꺼지고 객잔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건네진 것

어둠은 비명보다 더 무서웠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자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누군가는 출구를 찾다가 남의 등을 밟았고, 누군가는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빗소리는 지붕 위에서 북처럼 요란했고, 간간이 번개가 번쩍이며 객잔 안의 참상을 한 장면씩 비추었다.

검에 쓰러진 사내, 엎어진 탁자, 찢어진 휘장, 흩어진 은전.

그리고 검은 그림자들.

서문진은 숨을 죽인 채 기둥 뒤에 웅크렸다. 손 안의 옥패는 차갑고 단단했다. 이 작은 물건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손가락이 떨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리 내지 마."

낮고 또렷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까 이층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여인.

번갯불에 그녀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왼쪽 뺨에 피가 얇게 그어져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나는 아무것도—"

"네가 쥔 걸 봤다."

서문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겼다.

여인은 짧게 말했다.

"숨길 필요 없어. 저자들도 이미 안다."

실제로 객잔 반대편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졌다.

"옥패를 가진 놈을 찾아라!"

서문진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왜 하필 저예요?"

그 질문은 너무 억울해서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는 비를 맞으며 노새를 끌던 행상 견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옥패를 들고 살수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여인은 이상하게도 그 와중에 조금 웃는 듯했다.

"강호는 늘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부터 끌어들이지."

"저는 강호 같은 거 모릅니다!"

"이제 알게 되겠지."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줘."

서문진은 주지 않았다. 겁이 났지만, 동시에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전부 이 물건 때문이라면 함부로 넘겨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청의 노인의 외침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소년! 그걸—' 그다음이 무엇이었든, 다급했던 건 분명했다.

여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런 표정을 지은 얼굴은 도리어 더 아름다워 보였다.

"배짱은 있네."

"사부가 맨날 맞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판국에 농담이 튀어나오자 서문진 스스로도 놀랐다. 아마 너무 무서우면 사람은 웃게 되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짧게 숨을 내쉬더니 그의 손목을 잡았다.

"좋아. 그럼 살아남은 뒤에 실랑이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기둥 너머로 튀어나왔다. 여인이 몸을 돌려 검을 뻗었다. 칼끝은 상대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 사내는 비틀거리면서도 집요하게 들이닥쳤다.

"거기 있다!"

둘, 셋,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여인은 서문진을 뒤로 밀며 낮게 말했다.

"뒷문으로 뛰어. 마굿간 뒤 우물까지 가면 담이 낮다."

"그럼 당신은요?"

"나는 원래 이런 일을 한다."

그 말은 멋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번개처럼 끼어들었다. 청의 노인이었다. 그의 소매 한쪽은 붉게 젖어 있었지만 검은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소녀, 아이를 데리고 가라."

"노선배께서는?"

"늙은이는 길을 막는 데 익숙하다."

노인은 서문진을 흘끗 보았다. 그 눈빛은 처음보다 훨씬 날카롭고, 또 묘하게 따뜻했다.

"소년. 그 물건은 잃지 마라. 목숨보다 무겁다."

서문진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다. 대체 그게 무엇인지, 왜 자신에게 떨어졌는지, 당신들은 누구인지. 하지만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노인의 검이 다시 빛났기 때문이다.

순간 어둠이 갈라졌다.

강호의 문턱

여인은 서문진의 팔을 잡아끌고 뒷문으로 달렸다. 문짝은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고, 바깥으로 나가자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후려쳤다. 마굿간의 말들이 놀라 울부짖었고, 노새들은 밧줄을 당기며 몸부림쳤다.

진흙이 발목까지 튀었다. 서문진은 두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뒤에서는 여전히 함성이 들렸다.

"놓치지 마라!"

"옥패를 가져와!"

"죽여도 좋다!"

마지막 말에 서문진의 다리가 갑자기 더 빨라졌다.

그는 살면서 이토록 전력으로 달린 적이 없었다. 시장통에서 사부 심부름을 할 때도, 들개에게 쫓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폐가 타는 것 같고, 빗물은 눈을 찔렀으며, 손안의 옥패는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굿간 뒤 우물이 보였다. 정말로 그 너머 담장은 다른 곳보다 조금 낮았다. 여인은 담 위를 먼저 짚고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올라와."

"전 이런 거 못—"

"오늘부터 된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서문진은 이를 악물고 우물가 돌을 밟은 뒤 담에 매달렸다. 흙과 빗물에 미끄러지며 간신히 몸을 끌어올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암기가 날아와 담장을 때렸다. 돌조각이 튀며 뺨을 스쳤다.

"으악!"

"엎드려!"

여인이 그를 끌어당겼고, 두 사람은 담 너머의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축축한 풀과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문진은 한참을 구른 끝에 겨우 몸을 멈췄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자, 아래로 우화객잔의 붉은 등롱이 보였다. 빗속에서 흔들리는 그 등불은 아까보다 훨씬 작고 멀어 보였다. 하지만 객잔 안에서는 여전히 칼부딪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비탈 아래를 한 번, 숲길 쪽을 한 번 살펴보았다.

"지금부터 잘 들어."

서문진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따로 갈 거예요?"

"당분간은 함께 가야겠지. 넌 저걸 갖고 있고, 난 저걸 되찾아야 하니까."

서문진은 움켜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옥패의 가장자리가 손바닥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데요?"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빗물이 그녀의 속눈썹 끝에 맺혔다.

"네가 아직 몰라서 다행인 물건."

"하나도 안 다행한데요."

그녀는 이번엔 분명히 웃었다. 아주 짧았지만,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사람 같아지는 미소였다.

"살아남으면 설명해 주겠다."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추격대의 신호처럼 길게, 낮게 울렸다.

여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가자."

서문진은 객잔 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비 내리는 밤, 흔들리는 붉은 등롱, 그리고 그 안에 남겨진 청의 노인의 그림자. 오늘 아침의 자신은 저 문턱을 지나며 따뜻한 국수 한 그릇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이름 모를 여인과 함께 어둠 속 산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세상은 아침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원래 이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그동안 객잔 바깥의 비만 보았을 뿐, 처마 아래에 숨어 있던 칼과 음모와 인연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서문진은 차가운 옥패를 품속 깊이 넣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두려움 한가운데에 아주 작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무서웠다. 억울했다.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국수나 먹고 싶었다.

그런데도 발을 떼고 나니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이 밤이 끝나면, 다시는 예전의 서문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호는, 그 비 너머에서 조용히 입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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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대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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