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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 왜 산만할 때 더 잘 떠오를까? 유익한 산만함의 힘

우리는 요즘 거의 주문처럼 듣습니다.

집중해라, 몰입해라, 딴 짓 하지 마라.

특히 개발자나 지식 노동자는 더 그렇죠.

타이머 켜고 딥워크 모드 들어가고, 알림은 모두 끄고, 방해 요소를 싹 잘라내야만 생산적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상가이자 신경과학자인 머리나 밴 줄렌이 쓴 책,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1는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그 적당한 산만함이야말로 창조적 영감의 진짜 원천이 아니냐고요.

이 글에서는 그 책에서 던지는 핵심 아이디어들을 바탕으로,

제가 실제로 개발하고 글 쓰면서 경험한 것들과 함께 산만함, 지루함, 방황이 어떻게 통찰과 연결되는지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몰입 예찬에 조금 지친 분이라면, 이 글이 꽤 시원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창조적영감_표지

고도의 몰입만이 정답일까? 우리가 놓치고 있던 반쪽

딥워크, 플로우, 초집중.

요즘 생산성 키워드를 보면 전부 직선형입니다.

한 점을 향해 곧게 꽂히는 레이저 같은 느낌이죠.

저도 개발할 때 이런 생각으로 몰입하는 방법을 자주 씁니다.

특히 버그 잡을 때는 세상과 단절해야 빨리 끝납니다. 테스트 코드 돌리고, 로그 뒤지고, 스택 트레이스 따라가고, 이럴 때는 산만함이 확실히 독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코드를 몇 시간 동안 붙들고 씨름해도 안 풀리던 문제가, 샤워하다가, 산책하다가, 설거지하면서 갑자기 스르륵 풀릴 때가 있잖아요.

머리로는 그동안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뇌는 뒷배경에서 조용히 계산을 이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머리나 밴 줄렌의 메시지는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너무 일직선의 집중만 강조하느라, 뇌가 스스로 창조적 연결을 만들어내는 느슨한 상태, 유익한 산만함의 시간을 과소평가해 왔다는 겁니다.

두개의뇌모드

책의 핵심은 간단히 요약하면 이겁니다.

레이저 모드(집중)만으로는 새로운 것까지는 잘 안 간다는 거죠.

랜턴 모드(느슨한 주의)가 켜질 때, 예상 못 했던 것들이 연결되고 거기서 진짜 창조적 영감이 튀어나온다는 거고요.

저는 이걸 보고, 개발자의 뇌도 사실 CPU 하나가 아니라, 포그라운드 스레드와 백그라운드 스레드가 함께 돌아가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서는 버그 잡고, 뒤에서는 아이디어를 계속 컴파일하고 있는 거죠.

산만함이 왜 창조적 영감을 부르는가: 뇌의 작동 방식

산만함이 영감과 연결된다는 말이 처음 들으면 약간 자기위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감성 이야기가 아니라, 신경과학과 꽤 맞닿아 있습니다.

집중할 때 우리 뇌는 특정 네트워크가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에만 자원을 몰아주기 때문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는 오히려 불리합니다.

반대로, 산만하거나 멍 때릴 때 활성화되는 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녀석입니다.

이럴 때 뇌는 이미 저장해 둔 기억, 감정, 경험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연결하면서, 의식적으로는 하지 않을 법한 연산을 몰래 수행합니다.

그래서 창조적 영감은 보통 이 두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 문제에 깊이 몰입한 뒤

  • 그 문제에서 잠시 손을 뗐을 때

개발할 때도 비슷합니다.

하루 종일 한 기능만 팠는데도 깔끔한 구조가 안 떠오르다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로직 아예 이벤트 기반으로 따로 빼면 되네? 이렇게 갑자기 깨닫게 되는 순간들, 누구나 있을 겁니다.

머리나 밴 줄렌은 이 지점을 강조합니다. 몰입과 산만함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창조성의 앞판과 뒷판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한 몸이라고.

영감의 흐름

  1. 몰입 – 문제를 깊이 파고들기

  2. 이탈 – 산책, 샤워, 가벼운 대화 등으로 시선 돌리기

  3. 비의식 처리 – 뇌의 백그라운드 연산

  4. 통찰 – 갑자기 스위치 켜지듯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

영감의흐름4단계

개인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2번입니다.

우리는 1번만 열심히 하고, 2번을 죄책감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딴 생각, 딴 짓, 산만함을 죄처럼 여기니까 뇌가 백그라운드 작업을 할 시간 자체를 못 주는 셈입니다.

지루함은 왜 두렵지만, 결국 도움이 되는가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익한 산만함은 지루함과도 닿아 있습니다.

지루함은 굉장히 불편한 감정입니다. 앉아 있는데, 당장 할 일은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도 아니고, 뭔가 어정쩡하게 허공에 매달린 느낌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바로 스마트폰을 켜거나, 유튜브를 틀거나, SNS를 확인합니다.

지루함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즉시 차가운 정보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런데 이 지루함이야말로, 내 머릿속에서 아직 말로 나오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제가 제일 인상 깊었던 통찰은 이겁니다.

지루함은 생각의 빈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준비하는 대기실이다.

개발자로 일하다 보면, 프로젝트와 회의와 메신저와 이메일이 계속 이어집니다. 기획, 리뷰, 이슈, 일정. 정신 차려보면 하루가 이미 부서진 파편처럼 끝나 있죠.

그런데 그런 날은 이상하게도, 정말 중요한 생각은 하나도 안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느끼는 날,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이 모순 같은 체험이, 사실은 지루함의 힘을 말해 줍니다.

지루함과 자극의 스펙트럼

  • 자극 0: 완전 무기력 –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상태

  • 자극 중간: 가벼운 지루함 – 잡생각, 연상, 회상,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름

  • 자극 과다: 알림 폭탄, 정보 과부하 – 의미 없는 스크롤링, 깊은 생각 불가능

이걸 알고 나서 저는 일부러 지루함을 조금 남기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지하철에서 일부러 폰 안 꺼내기, 줄 서 있을 때 일부러 멍 때리기, 샤워할 때 음악 안 틀기.

처음에는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사이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꽤 쓸 만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버그 해결 아이디어, 글감, 서비스 기획 아이디어까지 다양하게요.

유익한 산만함과 그냥 시간 낭비의 차이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그럼 그냥 SNS만 계속 보고 있어도 영감이 떠오르는 걸까요?

이 책이 말하는 유익한 산만함은 아무 산만함이나 아닙니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미 나를 붙잡고 있는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 좋습니다.

프로젝트의 구조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인생의 다음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뇌가 뒤에서 계속 붙들 수 있는 씨앗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산만함이 나를 완전히 잠식하면 안 됩니다.

엔드리스 스크롤, 중독적인 영상은 뇌를 백그라운드 처리 모드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자극에 포그라운드를 통째로 빼앗아 버립니다.

셋째, 느슨하게 나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산책, 샤워, 가벼운 잡담, 창밖 보기 같은 활동이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만함 체크리스트

  1. 머릿속에 요즘 자꾸 떠오르는 질문이 있는가?

  2. 지금 하는 활동이 나를 완전히 빨아들이지 않는가?

  3. 멍 때리거나 생각으로 돌아갈 틈이 있는가?

  4. 끝나고 나서 더 가벼워지는가, 아니면 더 피로해지는가?

(3개 이상 Yes이면 유익한 산만함에 가까움)

저는 이걸 제 일상에 이렇게 적용해 봤습니다.

  • 유튜브 알고리즘 타고 끝없이 넘어가는 건 끊었습니다.

  • 대신 1~2개만 골라 보고 바로 끊고, 그 뒤에 일부러 5분 정도 멍 때리는 시간을 넣었습니다.

  • 산책할 때는 일부러 팟캐스트를 안 듣는 날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바꾸고 나니, 같은 30분의 산만한 시간이어도 끝나고 나면 머릿속에 실제로 남는 게 훨씬 많아졌습니다.

창조적 영감을 위한 하루 설계: 실전 버전

이제 좀 더 실전적인 이야기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유익한 산만함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발자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하루를 대략 네 구간으로 쪼개서 생각해 봅니다.

  1. 강한 몰입 구간

  2. 의도적인 산만함 구간

  3. 루틴 업무 구간

  4. 완전 휴식 구간

중요한 건 1번과 2번의 리듬입니다.

강하게 몰입해서 문제를 붙들어 놓고, 살짝 풀어주는 순간에 뇌가 알아서 뒤에서 계속 돌도록 여유를 주는 구조죠.

여기서 포인트는 2번을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일정에 넣는 겁니다.

예시 하루 루틴 (개발자 버전)

  • 오전 9:00–11:00: 고난이도 설계, 복잡한 버그 해결 – 레이저 모드

  • 11:00–11:20: 짧은 산책, 멍 때리기 – 랜턴 모드

  • 11:20–12:00: 이메일, 슬랙, 코드 리뷰 – 루틴 업무

  • 점심 후 20분: 의도적인 지루함 – 폰 없이 커피만 마시기

  • 오후 2:00–4:00: 구현, 테스트 – 레이저 모드

  • 4:00–4:30: 잡담, 가벼운 기사 읽기 – 랜턴 모드

  • 4:30–6:00: 정리, 문서화, 내일 할 일 리스트 작성

이게 완벽한 정답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건, 지루함과 산만함을 몰래 하는 죄악 시간에서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설계 요소로 승격시킨다는 겁니다.

머리나 밴 줄렌의 말대로라면, 이 시간은 실제로 생각의 깊이를 책임지는 핵심 시간이니까요.

창조적 영감은 번쩍이 아니라, 준비된 우연이다

창조적 영감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종종 번개 치듯 번쩍 떠오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해 보면, 영감은 거의 항상 두 가지의 합입니다.

  • 충분히 파고든 시간

  • 그리고 충분히 떠돌아다닌 시간

둘 중 어느 하나만 있어도 이상해집니다. 계속 파고들기만 하면 생산성은 있지만 새로움은 사라지고, 계속 떠돌아다니기만 하면 새로움은 많지만 정리된 성과가 없습니다.

개발자 입장에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 레거시를 깊이 파는 시간

  • 그리고 완전 다른 패러다임을 상상해 보는 시간

두 개가 합쳐져야 실제로 동작하면서도 새로운 구조가 나옵니다.

저는 글 쓸 때도 비슷하게 느낍니다.

자료를 찾아보고, 논리를 쌓고, 구조를 짜는 몰입의 시간과, 샤워하면서, 산책하면서, 아무 생각 없는 듯 걸어다니는 시간의 합이 결국 한 편의 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적 영감은 번쩍이는 순간이라기보다는 준비된 우연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연이 일어날 확률을 높이는 쪽에 있습니다.

나만의 인사이트: 산만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설계하자

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머리나 밴 줄렌의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가 던지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꽤 급진적입니다.

몰입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짜 통찰까지 가기 어렵고, 산만함과 지루함, 방황의 시간 속에서 뇌는 조용히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것.

제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개인적인 인사이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딴짓을 죄책감의 언어로 부르지 말자.

멍 때리기, 산책, 샤워, 잡생각은 창조적 작업의 일부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걸 인정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둘째, 정보 과잉은 산만함이 아니라 또 다른 집중이다.

무작정 SNS를 뒤지는 것은 사실 산만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자극에 완전히 몰입하는 겁니다. 창조적 영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조용한 산만함, 가벼운 지루함입니다.

셋째, 영감이 안 떠오를 때는 더 파고들거나, 더 쉬거나 둘 중 하나다.

애매하게 브라우저 탭만 늘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문제를 깊이 파거나, 아예 손을 떼고 돌아다니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개발자든 아니든, 지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제 산만함을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디자인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 하루를 설계할 때 집중할 시간만이 아니라 지루해질 시간을 일부러 넣어 보세요.

그 사이사이의 비어 있는 틈에서 의외로 지금까지 못 보던 연결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마, 우리가 찾던 창조적 영감의 진짜 얼굴에 가까울 겁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유익한 리뷰로 찾아뵙겠습니다 :)

참고

1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머리나 밴 줄렌

창조적 영감, 왜 산만할 때 더 잘 떠오를까? 유익한 산만함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