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산 장칼국수 성공스토리, 밑바닥에서 안수집사 된 역전 인생
## 밑바닥 욕쟁이, 안수집사 되다! 억대 연봉 버리고 장칼국수 대박 친 기적 [새롭게하소서 박영산]
밑바닥 인생에서 안수집사로: 박영산 대표의 파란만장 인생 대역전극, 그 놀라운 비결을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 스토리를 믿으시나요? 오늘, 바로 그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낸 박영산 대표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보려 합니다.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은행원, 그것도 대한민국 대표 S은행의 핵심 부서인 상품 개발부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갑자기 사업에 뛰어들어 쓰디쓴 실패를 맛보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됩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난이었을 텐데요.
그런 그가 어떻게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은 장칼국수라는 향토 음식을 전국적인 대히트 상품으로 만들었을까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과거에 담임 목사님께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던 그가, 지금은 교회 안수집사가 되어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박영산 대표의 파란만장했던 과거와 극적인 변화, 그리고 그 놀라운 성공 비결을 샅샅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억대 은행원에서 밑바닥 사업가로,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과거, 박영산 대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프로필을 자랑했습니다. S은행 상품 개발부에서 혁신적인 금융 상품들을 개발하며 승승장구했고, 주변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잘 나가는 은행원이었죠.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은행원 생활을 갑자기 청산하고,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이라는 험난한 정글에 뛰어듭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했던 장칼국수라는 다소 생소한 아이템으로 말이죠.
당시 장칼국수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낯선 음식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고추장이나 된장을 풀어 간단하게 끓여 먹던 소박한 국수였죠. 하지만 박 대표는 고향 음식이었던 장칼국수의 숨겨진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누나를 통해 장칼국수를 접하고 난 후, 그는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대표 국수가 될 것이다! 아니,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 확신 하나만으로 그는 과감하게 은행을 그만두고, 장칼국수 사업에 올인하게 됩니다. 정말 대단한 결단력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억대 연봉을 받던 엘리트 은행원에서 밑바닥 자영업자로 변신했지만, 사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손님은 하루에 한두 테이블이 전부였고, 매출은 처참했습니다. 그렇게 밑바닥을 헤매던 어느 날, 박 대표는 문득 자신의 허기진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 배고픔 속에서 교회 앞에서 잡채밥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는 '그분', 즉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다는 것을요.
"허기진 내 인생", 그리고 다시 만난 하나님
박영산 대표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 "허기진 내 인생"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프랜차이즈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진솔한 신앙 고백과 삶의 여정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죠.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세상적인 성공 스토리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이야기만을 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책 제목을 "허기진 내 인생"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 시절 배고팠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엄마는 파출부로 남의 집 밥을 차려주러 가셨고, 저는 학교에서 돌아와 빈 배를 채우기 위해 교회 앞에서 서성거렸죠. 그때, 하얀 접시에 담긴 따뜻한 쌀밥과 잡채밥은 제게 세상 가장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 허기졌던 어린 시절, 주님은 이미 박 대표를 만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을 만난 기쁨에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하지만, 과거에는 담임 목사님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했던 그가, 어떻게 지금처럼 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박영산 대표의 극적인 회심 스토리를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출생의 비밀, 그리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박영산 대표는 어린 시절, 남다른 출생의 비밀 때문에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강릉 주문진에서 엄마와 헤어져 홀로 할머니 댁에 맡겨졌습니다. 엄마는 그를 버스에 태워 보내면서 닭과 술병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주문진 등대 밑에서 내려 할머니 댁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맞는 것은 낯선 제사 풍경과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면서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일까? 나와 무슨 관계일까?" 하지만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물어볼 용기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박씨이고, 누나들은 김씨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탄생 배경에 얽힌 복잡한 가족사를 말이죠. 정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박 대표의 어머니는 재혼이었습니다. 첫 결혼에서 세 딸을 낳았지만, 남편이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박 대표의 아버지를 만나 재혼했는데, 아버지에게는 이미 본부인이 있었습니다. 본부인이 임신한 상태에서 박 대표가 태어난 것이죠. 결국 박 대표는 누나 셋, 형 하나를 두게 되었고,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복잡한 가족 관계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박 대표는 엄마에게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엄마, 나 이제 제사 안 가면 안 돼요?" 힘겹게 꺼낸 말에 엄마는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고 답했지만, 속마음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였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박 대표를 홀로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셨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셨죠. 남의 집 파출부는 기본이고, 탄광촌까지 가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태백 탄광촌 작은 마을에서, 박 대표는 어느 날 아침 머리맡에 놓인 엿가락 몇 개를 발견합니다. 엄마는 엿가락을 두고 새벽부터 일을 나간 것입니다. 당시 고물을 수집하면 엿과 바꿔 먹을 수 있었는데, 엄마는 고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것이죠.
엿가락을 받아 든 박 대표는 동네 아이들과 엿과 먹을 것을 바꿔 먹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리어커를 끌고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외롭기보다는 누나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고 답합니다. 누나들은 동생을 잘 챙겨주었고, 엄마 등보다 누나 등에 업혔던 기억이 더 많다고 회상합니다. 참 따뜻한 누나들이었네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 대표의 누나 중 한 분은 신내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몸이 안 좋을 때 병원에 가도 특별한 병명이 나오지 않자, 주변의 권유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점쟁이는 어머니에게 "신기가 있다"며 신내림을 권유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무당 아들로 성장할까 걱정되어 거부했습니다. 대신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막내 누나가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죠. 참 기구한 가족사입니다.
은행 입사 원서, 그리고 "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놀랍게도, 무속 신앙과 기독교가 혼재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박 대표는, 은행 입사 원서의 가훈 란에 성경 구절인 "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를 적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도 아니었고, 교회를 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성경 구절을 알게 된 걸까요? 더욱 신기한 점은, 은행은 종교와 전혀 상관없는 곳인데, 왜 하필 그 구절을 적었을까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박 대표는, 은행에서 제공된 원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원서에는 자기 소개와 가훈을 쓰는 란이 있었는데, 가훈을 떠올릴 수 없었던 그는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구절을 적었습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죠. 왠만한 식당에 가면 액자로 걸려있는 흔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원서를 보더니 당구채로 박 대표의 머리를 치며 "은행 면접 보는데 가훈에 성경 말씀을 써놓고, 종교는 무교라고 쓰면 어떻게 하냐!"며 혼을 냈습니다. 선생님은 기독교라고 쓰거나, 가훈을 바꿔오라고 지시했지만, 박 대표는 왠지 그 구절을 버리기 싫었습니다. 멋있기도 했고, 자신의 인생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죠.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고 원서를 제출합니다. 정말 엉뚱한 결정이었죠?
거짓말과 합격,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
하지만 문제는 최종 면접에서 터졌습니다. 면접관은 박 대표에게 "종교가 기독교네요? 교회는 다니나요?"라고 질문했고, 순간 당황한 그는 "네, 다닙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맙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면접관이 "강릉 성결교회 광 목사님 아시겠네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얼굴은 새빨개지고, 진땀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그는 "죄송합니다, 생각이 안 납니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죠.
면접은 계속 꼬여갔고, 박 대표는 불합격을 직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결과 발표 날, 그는 술을 마시며 자포자기 상태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합격 통보가 온 것입니다. 3학년 일반 박영산, 교무실로 오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고, 교무실에 가보니 선생님들이 줄 서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했던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합격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정말 미스터리입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박 대표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은행에 합격한 것은 기독교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어린 시절 교회 앞에서 잡채밥을 얻어먹었던 기억,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주기도문, 요한복음 3장 16절, 찬송가 가사들이 떠오르면서, 그는 어렴풋이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마이카 대출 신화, 그리고 뜨거웠던 신앙생활
은행에 입사한 박 대표는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습니다. 특히 그가 개발한 '마이카 대출' 상품은 금융 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2금융권에서 고금리로 취급하던 자동차 대출을, 1금융권에서 최초로 저금리 상품으로 출시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고차를 구매하는 서민들도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마이카 대출은 출시 직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신한은행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업적입니다.
마이카 대출을 개발하고 성공시키기까지 4년 동안, 박 대표는 뜨거운 신앙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상품 개발 과정에서 숱한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 번이나 은행장이 바뀌는 혼란 속에서도 마이카 대출은 꾸준히 성장했고,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상품으로 남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은행을 그만두고 나온 후에도, 박 대표는 마이카 대출의 영향력을 실감했습니다. 많은 은행들이 마이카 대출을 모방하여 유사한 상품들을 출시했고, 자동차 대출 시장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그 만큼 마이카 대출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혁신적인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아내와의 갈등, 그리고 목사님께 욕설 사건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박 대표였지만, 가정에서는 뜻밖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 후, 그는 종교에 전혀 관심 없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교회를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처가는 기독교, 본가는 무속 신앙, 그 사이에서 박 대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박 대표는 아내가 일요일 아침마다 사라지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어보면 쓰레기 버리러 갔다거나 누구를 만났다고 둘러댔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몰래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솔직하게 교회에 다닌다고 말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 크게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박 대표는 아파트 동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아파트 단지 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동대표들은 교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교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다른 시설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교회를 사장이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불법 건축 의혹을 제기하며 민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그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은 박 대표에게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박 대표는 아내에게 교회에 다니지 말 것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고, 가정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아이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가정은 점점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죠.
폭발 직전, 그리고 욕설 사건 발생
어느 날 퇴근길, 박 대표는 동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박 대표님, 아내 단속 좀 해야겠어요. 권영숙 씨가 그 교회에 수요일에도 가고, 성경 공부도 한다고 하네요." 전화를 끊는 순간, 박 대표는 머릿속에 야구 배트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노가 끓어올랐고, 이성을 잃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양보해서 큰 교회에 다니기로 했는데, 어떻게 나를 배신하고 그 교회에 다닐 수 있지?" 그는 곧바로 차를 몰고 교회로 향했습니다.
교회에 도착한 박 대표는 교회 입구에서 문을 잠그고 있던 목사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당신이 이 교회 목사야?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남의 순진한 아내 꼬드겨서 교회에 미치게 만들고, 남의 가정 파탄 내는 게 당신들이 원하는 거야?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 죽여버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울면서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극단적인 분노 표출이었죠.
욕설을 퍼붓고 난 후, 박 대표는 그 길로 집을 나왔습니다. 은행 근처 선배 오피스텔로 가출한 것이죠. 술 세 병을 들이켜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신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내가 우리 가정 이렇게 만들고, 당신 교회에 미치게 만든 인간들, 내가 어떻게 복수하는지 똑똑히 봐라!" 분노에 눈이 멀어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죠.
아내의 이상 증세, 그리고 후퇴
집을 나온 지 4일 정도 지났을 때,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엄마가 이상해. 아무것도 안 먹고 계속 누워만 있어." 처음에는 아내가 쇼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하루 이틀 더 지나 딸이 울면서 전화했을 때, 그는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이건 심각하다. 일단 후퇴하자." 결국 그는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쉽게 사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죠.
집으로 돌아온 박 대표는 아내에게 "나 잘못했어"라고 말했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혼자 집 청소를 하고, 와인을 준비하고, 눈물로 편지를 써서 아내 옆에 놓아두었지만, 아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차도가 없자, 그는 동네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의사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죠.
의사는 박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환자분 지금 당장 119 불러서 병원으로 모시고 오세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장기 손상이 올 수 있고,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박 대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이건 정말 안 되겠다." 그는 아내에게 달려갔습니다.
"여보, 안 돼!" 박 대표가 아내의 팔을 잡는 순간, 아내는 힘없이 손가락으로 그를 밀치며 흐느꼈습니다. "나 이 대로 죽게 내버려 둬. 당신 때문에 힘들어 죽겠으니, 제발 나한테 왜 그래!" 그 느낌과 흐느낌 속에 담긴 절망감에 박 대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에이씨, 이건 아니다." 그는 다시 아내를 눕혀놓고, 마지막 수단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욕설을 퍼부었던 그 교회, 집 앞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집 앞 교회, 그리고 사모님의 기도
박영산 대표는 집 앞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을 찾았지만, 목사님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대신 사모님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사모님은 박 대표를 보자마자 "권영숙 씨 남편 되시죠? 저희 좀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 다 죽어 가요"라며 걱정했습니다. 사모님은 곧바로 박 대표의 집으로 향했고, 아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사모님은 박 대표에게 미지근한 물을 떠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을 떠서 방에 들어간 박 대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내가 사모님의 기도 후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옆에서 애원하고 사과할 때는 꿈쩍도 않던 아내가, 사모님의 기도 한 번에 일어선 것입니다. "이건 뭐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박 대표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사모님의 기도에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그 순간,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죠.
아내는 점점 회복되어 갔지만, 박 대표는 여전히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큰 애 민경이가 이상해. 행동이 좀 이상하니까, 아버지 학교 좀 다녀오면 안 될까?" 아버지 학교? 또 교회 관련된 것인가? 박 대표는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 학교라니! 말도 안 돼!"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딸의 이상 증세는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아버지 학교, 그리고 아버지 용서 편지
딸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박 대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딸부터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마지못해 아버지 학교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토요일, 일산 신성교회에서 열린 아버지 학교에 참석한 그는 낯선 풍경에 당황했습니다. 줄무늬 셔츠를 입은 어르신들이 커피를 나르고, 찬양을 부르는 모습은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와 있는 걸까?" 후회와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학교 후반부 강의는 박 대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강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상처, 결혼 후 가정 문제, 그리고 아버지 학교를 통해 회복된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강사의 이야기는 박 대표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습니다. 자신이 꿈꿔왔던 가정 행복, 그리고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했던 걸까?" 그는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아버지 학교 1주차 과제는 아버지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과제를 받아든 박 대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를 악물며 덮어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상처가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 그는 점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직업도 없이 외도하고,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던 아버지의 고통과 힘겨움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 아버지도 참 힘드셨겠구나. 나는 은행이라도 다니고 월급이라도 받으니,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박 대표는 비로소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제가 앞으로 좋은 아버지가 되어 보겠습니다." 눈물로 용서의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속인 누나와의 화해, 그리고 교회로
아버지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고 난 후, 박 대표는 마음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매듭을 풀기 위해 인천에 살고 있는 무속인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누나는 오랜 무속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누나를 만나 아내와의 종교 갈등 이야기를 털어놓자, 누나는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야, 이 바보야! 내가 너희 가족 잘 되라고 이렇게 기도하는 건 내 방식이고, 네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 너도 교회 따라 나가. 너는 너대로 가정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지!"
누나의 말은 박 대표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얽혀있던 마음속 매듭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 교회에 가도 되는 걸까?" 누나는 "당연히 교회에 가도 된다"고 답했고, 박 대표는 누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 날, 제 발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그토록 싫어했던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회에 가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과거 목사님께 욕설을 퍼부었던 죄 책감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교회 사람들은 자신을 받아줄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교회에 가야만 할 것 같다는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시 한 번 교회 문턱을 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안수집사
교회에 들어선 박 대표는 예배당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이 울려 퍼졌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귀에 쏙쏙 들어왔고, 기도 시간에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그는 폭포수 같은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했습니다. 아버지 학교와 예배를 통해 은혜가 물밀듯 밀려왔고, 신앙생활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의구심이 남아있었습니다. '혹시 이단은 아닐까? 정말 제대로 된 교회일까?' 스파이처럼 교회를 탐색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원 회복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 대표는 생애 처음으로 방언을 체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모두 방언을 받고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했지만, 그는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찬양도 모르고, 말씀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는데, 왜 나를 이 교회로 이끌어 무릎 꿇게 하신 걸까?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포기하는 심정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안수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순간, 박 대표는 몸을 가눌 수 없는 강렬한 힘에 휩싸였습니다. 입신 상태에 빠지고, 알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오고, 몸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0분에서 한 시간 가량 지속된 성령 체험은 그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섬기던 리더 집사님은 "의심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세요"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말에 박 대표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이곳까지 이끌어주시고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그의 신앙생활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지금 박 대표는 교회 입구에서 새 신자들을 맞이하는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교회를 폭파시키려 했던 그가, 이제는 교회의 얼굴이 되어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예전의 분노에 찬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물론 담임 목사님께 사과도 했습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목사님은 넓은 마음으로 박 대표를 용서했고, 오히려 그를 격려하고 사랑으로 품어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시간이나 교회 행사 때마다 박 대표의 이야기를 꺼내며 간증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과거 교회를 폭파시키려 했던 장본인이, 지금은 교회의 간증 스타가 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역전 드라마이지 않습니까?
최근 안수집사 임직식에서 박 대표는 목사님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를, 목사님을 섬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제가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 앞에서 목사님의 큰아들이 되기를 약속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습니다. 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153 패밀리, 그리고 세계로 뻗어 나가는 꿈
은행을 그만두고 장칼국수 사업을 시작했을 때, 박 대표는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매출은 저조했고, 빚은 늘어갔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믿음의 힘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큐티 예배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포 기도를 통해 믿음을 키워나갔습니다. 놀랍게도, 선포 기도 후 매출은 기적처럼 상승했고, 사업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박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 이름은 '153 패밀리'입니다. 회사 이름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153마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텅 빈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고,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박 대표는 자신의 사업 초창기 모습이 텅 빈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기적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153 패밀리는 육수 공장까지 운영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브랜드 이름은 '강릉 장칼'입니다. 처음에는 남대문 시장 골목 작은 식당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서울 경기 지역에 매장을 확장했고, 밀키트 제품은 미국 H마트와 캐나다 마트에도 진출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시작한 밀키트 사업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강릉 장칼은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정말 꿈 같은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박영산 대표의 향후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는 "향후 비전은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겸손하게 답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보다 훨씬 더 크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53 패밀리는 153개국 진출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강릉 장칼은 전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글로벌 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대표에게 하나님을 만나서 가장 행복한 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세상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 '아버지'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제가 가진 것 없고, 경험 없고, 전공 없고, 도와줄 사람 없어도, 주님만 있으면 어디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백은 진심으로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박영산 대표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누구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