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심: 박정희 시대 비극과 내란범 vs 의인의 논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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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과 재평가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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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행적, 동기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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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재심 결정의 의미와 역사적 평가 변화 가능성
김재규, 그는 내란범인가 의인인가? 재심으로 재조명되는 박정희 시대의 비극
오늘 우리는 김재규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연 그를 단순한 내란 목적의 범죄자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다른 면모, 즉 억압적인 유신 체제에 저항한 의인의 모습은 없었을까요? 이 복잡하고 민감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김재규의 삶, 그리고 그의 재판 과정까지 심층적으로 파헤쳐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 김재규의 재심이 결정되면서, 그의 행적과 동기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킴 역사 개그맨은 과거 93년 영화 '증발'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김재규 중정부장과 김형욱 부장 실종 사건, 그리고 12.12 사태를 다룬 정치 드라마였으며, 당시 김재규 역할은 배우 신성일이 맡았습니다. 선킴은 젊은 시절 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흔히 '대통령 시해범'으로만 알고 있던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합니다. 영화 속 김재규는 단순히 권력욕에 눈먼 인물이 아닌, 고뇌와 갈등 속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이는 선킴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흥미로운 영화 속 설정 하나를 소개합니다. 영화 '증발'에서는 김재규가 프랑스에서 실종된 김형욱을 설득해 귀국시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영화는 김재규가 김형욱에게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라"며 회유하는 설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영화적 상상력일 뿐, 실제 역사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화적 묘사가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입니다.
이제 안동일 변호사의 법정 기록 회고록과 검찰 측 기록, 그리고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여 김재규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판단은 결국 여러분의 몫입니다. 먼저 김재규는 1926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인 구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철은 정미소를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고, 지역 사회에 학교를 지어 기증할 정도로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김재규는 일제 순사가 나무꾼에게 부당하게 땔감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항의하는 등 정의로운 성품을 보였다고 합니다.
해방 후 김재규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입학하는데, 여기서 9살 연상인 박정희를 동기로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같다는 공통점 외에는 당시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두 사람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만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묘사된 궁정동 만찬 장면과 김재규의 5.16 군사정변 참여 설정은 사실과 다릅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각색으로 보이며, 실제 김재규는 5.16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군사정변 후 혁명 찬성 여부를 강하게 추궁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김재규는 5.16 후 오히려 박정희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박정희는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호남비료 사장 자리를 김재규에게 맡겨 경영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김재규는 뛰어난 능력으로 호남비료를 정상화시켰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의 신뢰를 얻어 사단장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이후 6.3 사태 당시, 사단장으로서 시위 진압에 투입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더욱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의 장기 집권 계획을 김재규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72년 10월 유신은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박정희의 영구 집권 야욕에 김재규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고, 이때부터 박정희 제거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박정희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유신 선포 후,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국회의원직을 제안했지만, 김재규는 군인의 길을 걷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를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하며 사실상 하급자인 신직수 부장 밑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이는 박정희가 김재규를 길들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차장 시절, 김재규는 박정희의 견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중앙정보부가 야당 탄압 등 정치 공작에 개입하지 않도록 통제했으며, 이는 당시 검찰 기록에도 남아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건설부 장관직을 제안하는 등 계속해서 그를 시험했습니다.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 임명식장에서 박정희를 암살하려 했으나, 주변의 경계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재규는 70년대 중반부터 이미 박정희 제거를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김재규가 거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1979년 부마 민주항쟁이었습니다. 당시 가발 수출 등 경공업 위주였던 한국 경제는 2차 오일쇼크로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부산과 마산 지역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생계를 위협받는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부산 민심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현장을 시찰한 김재규는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하며, 자칫 전국적인 민란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의 보고를 묵살하고, 오히려 강경 진압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도 탱크로 밀어 죽였다"며 강경 진압을 옹호했고, 박정희 또한 서울에서 시위가 발생하면 발포 명령을 직접 내리겠다고 발언했습니다. 이에 김재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부산, 마산을 넘어 전국적인 대학살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김재규는 10월 26일, 마침내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흔히 10.26 사건은 술자리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재규의 증언은 다릅니다. 그는 치밀하게 거사를 계획했으며, 당시 상황을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를 제거하면, 10년간 억압받던 국민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또한, 당시 미국과 박정희 정권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점을 고려하여, "미국 또한 자신의 거사를 묵인하거나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김재규의 착각이었고, 그의 거사는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재규 사건 재판 과정은 속전속결로, 매우 허술하게 진행되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 재심을 여러 차례 탄원하며, "김재규의 의거로 유신 시대가 종말을 맞고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며 그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또한 김재규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심을 탄원했습니다. 심지어 김재규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양병호 대법원 판사조차 "김재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정희를 시해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며 재심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45년 만에 김재규 재심이 결정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재심을 통해 김재규 사건의 진실이 새롭게 밝혀지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김재규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었지만, 그의 시대적 고뇌와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김재규를 평가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번 재심 결정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0.26 사건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